연고지 상관없이 전원, 또다시 폭행 시달려…진실화해위, 시설 4곳 피해자 13명 진실규명 결정
#고과 점수 5점에 형제복지원으로 넘겨진 14세 소년
이향직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대표가 처음 형제복지원에 가게 된 건 1984년 봄.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아버지 몰래 친구들과 교회 수련회에 갔다. 집에 가지 않고 야구까지 보고 돌아가던 이 씨는 길거리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도망가려는 어린 이 씨를 근처 경찰서로 데려가 “장만 보고 금방 데리러 올 테니 그동안 겁 좀 주면서 맡아 달라”고 했다.
그때 경찰서 앞에 승합차 한 대가 섰다. 경찰은 “오늘은 뭐 없느냐”고 묻는 남성 질문에 홀로 남은 이 씨를 한 번 쳐다보고는 “좋은 곳을 가겠느냐”고 물었다. 문밖에 있는 아저씨를 따라가면 친구도 많고 하루 세 끼 밥을 챙겨주는 것은 물론 학교도 보내준다고 했다.
이 씨는 “좀 무섭기도 해서 대답을 못 하고 입만 삐죽거리고 있으니까 (나를) 그냥 차에 실어가버렸다”고 했다. 경찰은 장을 보고 온 이 씨의 아버지에게 “잠깐 한눈판 사이에 (아이가) 도망가버렸다”고 했다. 그렇게 형제복지원에서의 지옥 같은 3년이 시작됐다.
영문도 잘 모른 채 끌려간 사람은 이 씨만이 아니다. 부랑인 단속 및 강제수용의 근거 규정이 된 ‘내무부훈령 제410호’에 따라 부랑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어떠한 형사절차도 거치지 않고 시설에 감금됐다.
복지원에서는 수용자 숙소를 소대라고 불렀다. 형제복지원에 들어오는 모든 수용자는 신입소대를 거친 후 정식 소대로 배치됐다. 이 씨는 아동소대에 입소했다. 내부는 군대 내무반과 다를 것 없는 구조였다. 작은 철제 침대가 다닥다닥 놓여 있었다. 소대 창문은 쇠창살로 항상 가로막혀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능했다.
고된 강제노역과 무자비한 폭행도 숱하게 이어졌다. 국방 경비대 출신의 박인근 원장은 형제복지원을 군대처럼 운영했다. 복지원 체제에 비교적 순종적인 수용자에게 완장을 주고 같은 수용자를 관리하도록 했다. 조장, 반장, 실장, 소대장, 중대장으로 이어지는 계급은 복지원 운영을 더욱 기형적으로 만들었다.
소대 안에서도 유독 몸이 약한 편이었던 이 씨는 맞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는 “아동 소대에 있던 사람 중에 날 때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매일 벌레가 섞인 밥을 먹어야 했고 누군가 도망가면 남은 이들이 그들 몫까지 맞아야 했다. 계속되는 기합에 나중에는 바닥에 머리를 대고 엎드린 상태에서 잠도 잘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87년, 형제복지원 만행이 세상에 알려져 폐쇄될 무렵에야 이 씨와 피해생존자들은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피해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수용소 뺑뺑이’
악몽 같았던 형제복지원에서의 생활도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복지원 관계자가 이 씨를 불러 차에 태웠다. 3년 가까이 군대식 생활에 길든 이 씨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차가 멈춘 곳은 또 다른 집단수용시설인 소년의집이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 씨는 이튿날 서울시립갱생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복지원에 있는 동안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익숙해진 상태였다. 부산에서 연고도 없는 서울로 간다는데 그냥 ‘가면 가는가 보다’ 했다”고 말했다.
갱생원에선 1년 넘게 봉투에 풀을 붙이는 일만 했다. 이곳에서도 폭행은 계속됐다. 봉투를 붙이다 실수를 하면 조장에게 기합을 받거나 맞았다. 입소 당시 15세였던 또 다른 피해자 이 아무개 씨는 “작업 불량이 나오거나, 식사 중 음식을 남기면 방장이 말로 설명하지 않고 주먹으로 얼굴 등을 쳤다. (어리다 보니) 맞으면서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입소와 전원 그리고 퇴소까지 이 씨 의사와는 무관하게 결정됐다. 하루는 갱생원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던 수사가 이 씨를 버스 터미널로 데려갔다. 그는 이 씨에게 버스표와 500원 짜리 동전 6개를 주며 “가라”고 했다. 기나긴 수용소 생활의 끝이었다. 수십 년 뒤 소년의집과 형제복지원 등에서 발견된 이 씨의 입소자료에는 그가 ‘자진귀가를 했다’고 써있었다.
이 씨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350여 명의 회원 가운데 형제복지원을 제외한 타시설에 수용된 경험이 있는 피해자는 절반 이상이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정동수 씨는1987년 4월 형제복지원에서 소년의집으로 전원됐다. 이후 소년의집에서 벌어진 무차별적 폭행에 놀라 도망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5년 4개월이었다. 이상명 씨와 이형우 씨 역시 형제복지원에서 나와 서울시립갱생원에 2년 가까이 있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2기는 조사를 통해 수용자들이 부산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다른 시설로 강제 전원되는 등 ‘회전문 입소’가 이뤄진 실태를 최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일요신문이 만난 피해 생존자들은 부산에서 서울로, 또 서울에서 대구로, 다시 대구에서 인천으로 가는 등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
명목상 이유는 연고지 이송이었지만 실제 수용자 연고지는 수용 시설이 있는 곳과 무관한 경우가 다수였다.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1986년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경기 성혜원으로 전원된 수용자 69명 가운데 신상 자료가 남은 9명의 기록을 확인한 결과 본적이나 주소가 경기 지역인 경우는 단 2건에 불과했다.
경기 성혜원에 있었던 박 아무개 씨는 “형제복지원에서 폭행을 많이 당해 몸이 시퍼렇게 된 사람들이 성혜원에 와서 한 달 있다가 대구 희망원으로 가고, 희망원에서 있다가 폭행을 심하게 당하면 인천으로 보내는 식으로 ‘뺑뺑이’를 돌렸다”고 했다.
한편 부산 형제복지원의 경우 1987년 인권침해 실상이 폭로돼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이 있었던 반면 서울시립갱생원, 대구시립희망원, 충남 천성원(성지원, 양지원)과 경기 성혜원 4개소는 당시 어떠한 공적 조사도 받지 않은 채 부랑인 수용 업무를 계속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 결과 1980년 서울시립갱생원 수용자 추정 인원 1000명 중에서 25%가 넘는 262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성지원에선 1982년부터 10년간 시설 사망자 시신 117구를 해부 실습용으로 한 의과대학에 넘긴 사실도 드러났다. 천성원과 시립희망원의 경우 시설에서 태어난 아이를 출생 직후 입양 알선기관에 넘기기도 했다. 이 시설들은 현재 이름이나 형태, 운영 법인 등을 바꿔가며 유지되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6일 위 4곳에서 벌어진 성인 부랑인 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13명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이상훈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9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37년 동안 은폐된 전국 부랑인 수용시설 실태를 종합적으로 규명한 의미가 있다”며 “피해자들의 개별 구제신청 없이도 적절한 보상 및 재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고 밝혔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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