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형태와 다른 보이스피싱 조직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처음부터 범행 실체를 파악한 상태에서 장기간에 걸쳐 범행을 저질렀으며 다른 조직원들의 검거 소식을 들었음에도 범행을 지속하였다”며 “그럼에도 현재까지 그 피해가 조금도 회복된 바 없고 앞으로도 피해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앞서 경찰은 2023년 IP 추적과 전화 음성 목소리 분석 등을 통해 이들이 중국에 거점을 둔 것을 확인하고 조직원 40여 명을 체포한 바 있다. 경찰이 검거한 보이스피싱 범죄조직 중 최대 규모였다. 특히 피해자 중에는 12차례에 걸쳐 41억 원을 빼앗긴 의사도 있었다. 이 역시 보이스피싱 피해로는 단일 사건 중 가장 큰 피해 금액이다.
일요신문은 2024년에 선고된 김군일파 사건 관련 판결문 7개와 피해자들 증언을 분석했다. 판결문에 적시된 피해자는 1900여 명, 피해 금액은 1500억 원이 넘었다. 수법은 치밀했다. 기존의 보이스피싱 조직이 대부분 점조직 형태로 운영됐다면 김군일파는 조직 내에서 모든 범죄가 이뤄졌다.
개인정보를 해킹해 피해자 정보를 수집하는 ‘DB팀’, 대포계좌를 확보하는 ‘장집’, 보이스피싱을 수행하는 ‘콜센터’, 피해자로부터 현금을 수거해 대포계좌에 입금하는 ‘출집’과 이를 국내 인출책에게 전달하여 현금을 인출하는 ‘세탁집’ 등이 한 조직 내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다른 조직의 손을 빌릴 필요 없이 김군일파 조직 안에서 모든 범행을 실행한 것이다.
콜센터 조직원들의 경우 범행 시나리오에 따라 1선, 2선, 3선으로 나뉘어 움직였다. 말단 조직원인 1선이 수사관 역할을 맡아 예금 적금 등 피해자 재산을 확인하면, 검사 역할을 맡은 2선 조직원이 검사 신분증과 법원 영장을 제시하면서 현금을 갈취한다. 이어 3선 금융감독원이나 금융위원회 직원을 사칭한 직원이 “명의 도용사건이므로 대출이 정상적으로 나오는지 봐야 한다”며 대출을 유도했다.
한번 먹잇감이 된 이상 빠져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카카오톡 링크를 통해 피해자 휴대폰에 악성 애플리케이션(앱)을 깔고 24시간 감시했다. 악성 앱이 깔린 휴대폰은 어디로 전화를 걸어도 정해진 곳으로 연결되도록 설정됐다. 일부 피해자들이 사기 연루를 확인하기 위해 검찰청에 전화를 걸었으나 실제 연결된 곳은 검찰 수사관을 사칭하는 김군일파 조직원들의 전화기였다. 금감원과 금융위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가짜 검사실을 만들어 피해자들을 속이기도 했다. 이들이 만든 검사실에는 대한민국 국기와 검찰청 깃발, 검찰 마크가 붙어있는 압수물 박스와 법복까지 구비돼 있었다. 조직원들은 피해자들에게 화상 공증이라며 영상통화를 걸어 각종 서류와 공소장 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공소장과 공문서 역시 정교하게 조작된 허위였다. 경찰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해당 문서에는 검찰과 법무부 마크는 물론 기관 직인과 담당 조사관, 검사장 이름과 서명까지 포함됐다. 법조계 종사자가 아니라면 충분히 속을 법했다.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은 날로 진화하고 있다. 김군일파는 국내 방송에 출연한 유명 검사의 실제 목소리를 추출한 뒤, 조직원 음성과 합성한 이른바 ‘딥보이스’ 기술을 도입해 이를 범죄에 악용하려고도 했다. 검거된 일부 조직원들은 수사기관에 “검사 얼굴과 목소리를 조직원에게 합성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자백했다.
피해자 A 씨는 “보이스피싱을 당했다고 하면 다들 그런 뻔한 수법에 넘어가냐면서 피해자 탓을 하는데 이건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토로했다.
A 씨는 “처음에는 당연히 보이스피싱을 의심했다. ‘못 믿겠으니 직접 확인 후에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직접 검찰 번호를 검색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검찰 직원이 ‘정말 사기 사건에 연루된 것이 맞다’고 하더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며 “휴대폰까지 조종하고 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나. 이후로 24시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매일 이어폰을 낀 채 생활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틈도 없이 1분 단위로 명령이 떨어졌다. 보이스피싱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땐 해방감마저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군일파 조직원이 여성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사실도 밝혀졌다. 조직원 이 아무개 씨와 민 아무개 씨 등은 여성 피해자에게 “본인 확인을 해야 하니 카메라를 켠 상태에서 상의를 벗고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피해자가 망설이면 “검찰에 와서 대면 조사를 받고 싶으냐”고 협박했다.
피해 사실을 알아채고 돈을 돌려달라는 피해자에게 성적인 사진이나 영상을 요구하기도 했다는 내부자 진술도 나왔다. 이 조직원은 재판 과정에서 “일부 남성 조직원이 여성 피해자에게 돈을 돌려받고 싶으면 음란 영상을 보내라고 한 것을 들었다”고 증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직원 관리도 철저했다. 수사기관에 검거될 것을 염려한 조직원이 탈퇴 의사를 밝히면 관리자급 조직원이 나타나 탈퇴를 만류하고 설득했다. 주말엔 사무실 근처 운동장이나 체육관에서 총책 김군일을 포함한 모든 조직원들이 모여 단합 목적의 축구를 하고 회식을 했다.
또, 수사기관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한국인 조직원들의 개별적 만남을 금지하고 조직 내에선 가명을 사용하도록 지시해 서로의 인적 사항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했다. 국내 조직원이 한국에 일시 귀국할 경우 범행에 사용된 휴대전화를 반납하게 했다. 만약 중국으로 복귀하지 않는 경우 수사기관에 검거됐다고 판단해 사무실과 숙소를 옮겨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편취한 범죄 수익금은 매주 조직원들 실적에 따라 정산해 분배했다. 수사관을 사칭한 1선 조직원은 10%, 검사를 사칭한 2선 조직원은 8%, 3선인 금융위원회 사칭 조직원에게는 3% 등 역할에 따라 차등해 조직원들에게 분배했다. 말단인 1선에게 가장 많은 인센티브를 분배해 충성심을 높이는 방식이었다. 그 외 사무실 관리비를 제외한 나머지 범죄 수익금의 80%는 총책인 김군일이 챙겼다.
#“억대 사기 당해도 피해보상은 0원”
국회는 2019년 8월 부패재산의 몰수 및 회복에 관한 특례법을 개정해 보이스피싱과 같은 조직적인 사기 범죄의 피해자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하지 않더라도 범죄자가 빼돌린 재산을 국가가 찾아내 돌려주도록 했다. 횡령·배임죄 등으로 국한됐던 기존 부패재산몰수법의 적용대상을 △범죄단체를 조직해 범행한 자 △유사수신행위수법·다단계판매 방법으로 기망한 자 △보이스피싱 등 특정 사기범죄를 저지른 자로 확대했다.
그러나 현실에선 억대 사기를 당해도 피해보상을 한 푼도 못 받는 경우가 다반사다. 범죄수익금 추징은커녕 배상명령신청도 각하된다. 배상명령제도는 변호사를 선임할 시간적, 물적 여력이 없는 사기 범죄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만들었다. 지난 12월 9일 선고된 김군일파 사건 피해자들의 배상명령신청 역시 모두 각하됐다. 재판부는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배상 범위와 책임이 명확하지 않다”고 판시했다.

범죄수익금을 몰수하는 추징 명령이 인용된다고 해도 피해 회복의 실효는 없다. 이 역시 국가에 귀속될 뿐 피해자가 직접 돌려받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스피싱으로 막대한 빚을 지게 된 피해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상을 살아간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기 쉽지 않다. 특히 가족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죄책감에 비싼 수임료를 내고 민사소송을 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 한다는 게 피해자들 말이다.
반면 범죄자들은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돈으로 비싼 변호사를 선임한다. 변호사는 피해금액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합의금을 제시하며 “민사소송으로 넘어가면 이 돈도 받기 힘들 것”이라며 피해자를 압박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합의하면 범죄자는 형사법정에서 감형받는 행태가 흔하다.
2년 전 피해를 입었다는 피해자 B 씨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남은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란 말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며 “가스라이팅 당한 후에는 온종일 여러 은행 지점을 돌며 현금을 모두 인출했다”며 “조직원들이 잡힌 현재까지도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 한 채 빚만 갚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중앙지검은 보이스피싱 피해를 줄이기 위해 2020년부터 ‘보이스피싱 서류 진짜인지 알려줘 콜센터(찐센터)’를 개설하고 운영 중이다. 찐센터 직통번호(010-3570-8242)로 전화를 걸거나 카카오톡을 보내면 검찰 관련 서류의 진위 여부와 조사 여부 등을 안내 받을 수 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