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4단’의 바둑 실력을 갖춘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선거가 끝난 뒤 ‘아마5단’으로 알려진 안철수 전 후보와 한 판 둘 의향이 있다고 한다. 제공=문재인 |
“유명 인사들의 바둑 실력은 대개 조금씩은 과장이 되어 있기 마련이어서” 이런 ‘설’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바둑 기자 몇이 직접 물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시간이 도저히 맞지 않았다. 방법은 서면 인터뷰뿐이었다. 몇 사람이 공동으로 ‘평이하고 일반적인’ 질문지를 만들었다. 질문지를 문재인 캠프에 보낸 지 사나흘 만에 답신이 왔다. 다음은 답신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
― 바둑은 언제 배우셨는지?
▲ 우리 세대는 어릴 적 동네에서 어르신들이 둘러 앉아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르신들이 두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성년이 된 뒤에는 <월간바둑>을 정기구독하면서 거기에 실린 기보를 복기하면서 연습했다.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의 대국을 많이 복기했던 것 같다. 2차 술자리는 잘 안 가는 스타일이고,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와 기보를 보면서 명국을 복기해보곤 했는데, 그게 실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 기력은?
▲ 아마4단인데, 바둑을 자주 못 두어 실력이 줄었을 것이다.
― 바둑 스타일(기풍)은?
▲ 나는 법률을 전공해서인지 매사를 논리적으로 검토하고 결론을 내리는 편이다. 이런 스타일이 바둑에도 반영되는 것 같다. 행마를 할 때, 상대방의 대응을 ‘플랜 1, 2, 3…’ 식으로 따져보고, 거기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면 최종 착점한다. 직관적으로 두기보다는 논리적으로 따지는 장고형 바둑에 가깝다. ― 요즘 바둑 둘 시간이 있으신지…^^?
▲ 바둑판 앞에 앉아 본 것이 10년쯤 된 것 같다. 10년 전, 청와대에 들어간 뒤부터 한 번도 두지 못했다. 과거 변호사 시절, 바둑 친구와 어울렸던 시간이 많이 생각난다. 한참 열심히 둘 때는 변호사 사무실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또 예전에 부산일보사가 명사초대전에 초청해 주어 나간 적이 있다. 당시 기보가 부산일보에 실렸다.
― 재미있는 추억이 있다면?
▲ 10여 년 전쯤, 지인 4~5명과 추자도 근처 무인도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낮에는 낚시를 하고, 밤에는 야영을 했다. 그때 텐트 안에서 바둑을 두었다. 주변은 불빛이 없어 칠흑같이 어두웠다. 각자 머리에 등산용 헤드랜턴을 쓴 채 휴대용 바둑판으로 대국을 벌였다. 밤바다는 연신 파도가 철썩거리고,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줄기 헤드랜턴 불빛만이 맹렬히 움직였다. 지금껏 그때처럼 우주적이고, 낭만적인 바둑을 두어본 적은 없었다.
― 좋아하는 프로기사나 기억하고 있는 명국이 있다면?
▲ 조훈현 9단은 ‘제비’라는 별명처럼 행마가 빠르고 현란해서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서봉수 9단은 ‘잡초류’라는 별명처럼 밟아도 밟아도 되살아나는 질긴 생명력이 인상적이다. 특히 순수 토종기사라는 점 때문에 내심 열렬히 응원했다. 1993년 5월에 있었던 잉창치배 결승에서 서봉수 9단이 일본의 오다케 히데오 9단을 3 대 2로 누르고 우승했을 때는 정말 짜릿했다.
― 바둑의 좋은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 복기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되짚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복기를 하다보면 자신이 왜 그런 착점을 했는지, 더 나은 대안은 없었는지 반성할 수 있고, 이런 반성이 쌓이다 보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또 복기가 가능할 정도로 자신의 대국을 다 기억하려면 매순간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최고의 집중력으로 한 수를 찾는 식으로 행마의 자기근거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이후 복기가 불가능하다.
― 정치권에는 바둑용어도 적지 않고 정치인 중에 바둑을 좋아하시는 분도 많은데, 바둑과 정치의 닮은 점이 있다면?
▲ 바둑 속언인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같은 말은 정치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의 대마 잡을 궁리만 하면 결국 자기 대마가 잡히고 마는 것처럼, 정치를 할 때도 항상 자신의 스탠스를 탄탄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공치사하거나, 상대방의 약점만 물고 늘어지기보다는 우선 자신의 내실을 다진 뒤에 기회를 노려야 한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고, 항상심(恒常心)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또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은 바둑판과 정치판에서 불변의 진리다. 작은 이익을 탐하다가 대사를 그르치는 법이다. 정치를 할 때도 항상 소탐대실의 교훈을 명심하면서 자신을 비운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 바둑공약이 있다면?
▲ 바둑은 세계적인 문화상품이다. 한국은 지금 바둑 최강국이지만, 문화적 인프라는 취약하다. 지금의 바둑 실력만 내세우면서 제도적 보완을 서두르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바둑은 어린이들의 게임중독증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대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게임 못지않게 재밌을 뿐 아니라 집중력과 논리적 사고능력을 키우는데 바둑만한 것이 없지 않은가. 바둑을 사회적 스포츠로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고민해 보겠다.
― 후보단일화를 이룬 안철수 박사와 선거 끝난 뒤에 한 판 두어보실 의향이 있으신지? 결과를 예측하신다면? ^^
▲ 안철수 후보께서 승낙하시면, 나는 언제든 좋다. 우스갯소리지만, 단일화가 교착국면에 빠졌을 때, 바둑으로 단일 후보를 결정하라는 말도 있었다. 승패는 예측 불허인데, 아무튼 최선을 다할 것이다.
― 바둑팬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가로세로 19줄의 반상 위에서 펼쳐지는 바둑의 묘수는 무궁무진하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최후의 순간까지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바둑을 지배하는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바둑의 세계는 평등하다. 연장자에게 백돌을 건네는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다면, 어느 누구도 한꺼번에 두 개의 바둑알을 놓을 수 없다. 기력이 낮은 사람도 몇 점 접바둑을 두는 방식으로 고수와 평등하게 겨룰 수 있다.
둘째, 바둑은 공정하다. 꼼수나 상대방의 실수로 가끔 이득을 볼 수는 있지만, 최종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대국자의 실력이다. 실력 외에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다.
셋째, 이처럼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으로 결정되는 최종 승패의 결과는 매우 정의롭다. 또한 대국에서 패했더라도, 언제든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바둑의 세계가 보여주는 이런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는 내가 주장하는 ‘사람이 먼저’인 나라의 모습이기도 하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바둑의 세계처럼 정의로운 나라, 패자부활이 가능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