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X팬오션을 매물로 내놓은 강덕수 회장은 그룹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신문 DB |
2004년 5월 인천정유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신 강덕수 회장은 곧바로 11월 범양상선 인수전에 참여했다. 결국 주당 2만 2000원에 범양상선 지분 67%를 매입(약 4400억 원)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2년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던 범양상선은 영업이익 778억 원을 기록한 데다 자체 선박 57척, 용선(빌린 배) 200여 척을 보유한 ‘알짜 중 알짜’였다.
무엇보다 범양상선의 매출액은 1조 9000억 원으로 STX의 전체 매출액인 1조 5000억 원보다 많았던 것이 우려의 시선을 받는 이유였다. 재계와 금융권에서는 ‘승자의 저주’라는 말까지 흘러나왔는데 여기에는 샐러리맨 출신인 강덕수 회장의 질주에 대한 질시가 스며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강 회장은 재계와 금융권의 우려를 보란 듯이 씻어냈다. 새 주인과 새 이름으로 다시 닻을 올린 STX팬오션은 2000년대 중반부터 조선·해운 최대 호황을 누리며 STX 발전을 견인했다. STX팬오션은 STX조선의 선박 건조·유지·보수·관리, STX에너지에 필요한 유연탄 등 에너지 원료의 안정적인 수송 등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STX팬오션 인수로 STX그룹은 하나로 연결되면서 조선·해운 호황을 만끽했다. 오죽하면 ‘STX팬오션이 STX그룹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평가가 있었을 정도다.
해운업계와 M&A업계에서는 이번 STX팬오션의 매각 작업이 순조로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벌크선업계 2위인 대한해운이 매물로 나와 있는 상태고 조선·해운 경기가 언제쯤 회복될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STX 관계자는 “조만간 매각 주간사를 선정하는 등 구체적인 일정이 잡혀 있다”며 “대한해운과 함께 거론되는 것에 큰 영향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STX팬오션이 매물로 나오자마자 현대글로비스, 삼성SDS 등이 인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현재까지 당사자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STX팬오션의 규모로 볼 때 두 회사가 유력하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일각에서는 STX팬오션 매각 발표는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뒤에 산업은행이 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경기가 좋아지면 금방 효자가 될지도 모르는 STX팬오션을 굳이 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맺은 재무구조개선 약정 때문에서라도 재무건전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어느 정도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이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얘기다.
STX OSV 매각은 확정됐지만 STX중공업과 STX메탈의 합병, STX다롄의 자본유치 등 STX의 재무구조개선 작업이 대부분 지지부진한 탓도 크다. STX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STX를 책임져주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면서 “오히려 슬림화하는 게 좋겠다는 요구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STX팬오션 매각 철회 가능성에 대해서는 “가뜩이나 시장에서 신뢰가 떨어진 마당에 매각을 철회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며 완강히 부인했다.
2004년 인수 당시 ‘승자의 저주’가 회자되기는 했지만 좋은 결과를 보인 데서 강덕수 회장의 경영 능력과 혜안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비록 높은 가격에 인수해 우려의 시선을 낳았지만 해운업 호황을 예측해 크게 성공한 것은 CEO(최고경영자)로서 평가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해운업이 한창 잘나갔을 때 이후 경기를 예측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투자해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대표적인 자본집약적 산업인 해운과 조선은 경기에 민감하고 함께 움직인다”며 “사업 포트폴리오가 여기에 치우쳐져 있으면서도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위기를 불러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양한 선단을 구축하지 못한 채 벌크선 위주로 운영한 것도 STX팬오션이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한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STX는 인적 구조조정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임원 20% 감축’ 얘기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STX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는 ‘임원 다음엔 직원 아니냐’는 우려가 돌고 있다.
STX팬오션을 내놓은 강덕수 회장은 조선과 에너지에 집중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업황 전망이 여전히 불투명한 데다 에너지사업 역시 ‘동해 프로젝트’가 지지부진하고 삼척 화력발전사업에서는 지방의회의 동의를 받지 못해 경쟁업체에 뒤처지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 강 회장에게 ‘샐러리맨의 신화’, ‘M&A 귀재’라는 명성을 안겨준 STX팬오션의 매각이 강 회장 신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행여 그룹 성장의 상징이었던 STX팬오션이 다른 쪽의 상징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돈맥경화’ 걸리면 치명적
해운업계에서 배의 종류는 크게 컨테이너선과 벌크선 두 가지로 나뉜다. 컨테이너선은 완성품을 컨테이너 박스에 담아 운반하는 배를, 벌크선은 철광석 석탄 등 원자재를 실어 나르는 배를 일컫는다. 컨테이너선은 박스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기에 따로 커다란 저장 공간이 필요하지 않지만 ‘흩어지는 화물’을 실어 나르는 벌크선은 배 내부에 이를 담을 수 있는 커다란 저장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STX팬오션 대한해운 등이 벌크선, 현대상선 한진해운 등은 컨테이너선 위주다. 벌크선의 한 종류로 웻(Wet) 벌크선이 있는데 이는 LNG나 원유 등을 나르는 배를 말하며 ‘탱커’라고도 일컫는다. LNG선, 유조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해운업계 관계자들은 “컨테이너선과 벌크선 중 어떤 쪽이 경기에 더 민감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공교롭게도 벌크선 위주인 STX팬오션과 대한해운이 모두 사정이 좋지 않아 벌크선이 훨씬 경기에 민감한 것으로 비치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보다는 어떤 회사가 더 많은 장기계약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거두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다. 워낙 자본집약적 산업이어서 현금 유입이 줄어들고 흐름이 나빠지면 훨씬 큰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자본력이 취약한 기업은 해운업계에서 버티기 힘들다는 것. STX팬오션과 대한해운의 상황은 이 같은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셈이다.
임형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