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거래위원회가 5월 발표한 ‘2025년도 공시대상 기업집단’에 포함된 그룹은 92곳이다. 그룹 자산 기준 5조 원을 상회하면 공시대상기업집단 명단에 이름이 오른다. 이 중 지배구조 상단에 있는 상장사의 자사주 비중이 가장 높은 그룹은 롯데그룹이다. 롯데지주는 지난해 말 기준 발행 보통주 가운데 32.51%가 자사주였다. 롯데지주는 2017년 지배구조 개편을 위해 출범하는 과정에서 자사주 비중이 높아졌다.
자사주를 소각하더라도 신동빈 회장을 비롯한 지배주주의 경영권은 흔들리지 않는다. 신동빈 회장을 비롯한 오너일가 지분율은 총 발행주식을 기준으로 40.5%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지분율은 60%까지 오른다.
다만 최대주주인 신동빈 회장의 지분율이 다른 주요 주주를 압도할 만큼은 아니다. 총 발행주식 기준 신동빈 회장의 지분율은 13.0% 수준이다. 호텔롯데는 11.1%, 롯데알미늄 5.1% 등 롯데그룹 내 다른 계열사도 지분을 갖고 있다. 롯데그룹은 발행주식의 15%에 해당하는 자사주를 지배주주나 특수관계인에게 처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롯데지주의 계획이 실행될지는 미지수다. 주주가치 제고로 인정받기 어려워서다. 별다른 사업적인 이유 없이 자사주를 매각해 유통주식을 늘리면 주주가치가 희석된다. 이 때문에 감독 당국도 자사주 매각에 대한 감독 기준을 높이고 있다.
태영그룹의 지주사 티와이홀딩스는 자사주 비중 29.79%로 공시대상기업집단 가운데 두 번째로 자사주 비중 높다. 티와이홀딩스의 오너일가 지분율은 발행주식 기준 33.63%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47.9%까지 지분율이 상승한다. 자사주 소각에도 경영권이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태영그룹은 자사주 소각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재무구조 개선 등의 목적으로 자사주 매각과 소각을 검토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워놓은 정도다.
대신증권은 지난해 말 기준 자사주 비중 25.17%로 3위를 기록했다. 대신증권은 자사주를 꾸준히 매입하고 있다. 이를 재원으로 임직원에게 자사주를 상여금 명목으로 지급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자사주를 지급받는 임직원 가운데 경영에 참여하는 오너일가도 포함됐다. 지난해 이어룡 회장과 양홍석 부회장은 각각 자사주 6만 2203주, 9만 9850주를 성과급으로 받았다.
대신증권의 경우 오너일가의 지배력이 약해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되면 경영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너일가의 의결권이 있는 주식의 지분율은 16.04%다. 자사주 소각을 통해 지분율이 상승해도 23.2%에 그친다. 대신증권은 자사주에 대한 처분이나 소각 계획은 구체적으로 없다. 경영환경이 변화하거나 주식 기준 보상제도에 따라 자사주를 활용할 방침이다.
SK그룹의 지주사 SK(주)는 총 발행주식 가운데 24.8%를 보유해 4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 기준 오너일가의 지분율은 25.52%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33.9%다. 통상 오너일가 지분율이 30%를 돌파하면 경영권 방어가 가능하다고 보지만 자사주가 없으면 경영권 방어를 위한 난도가 오른다.
SK(주)는 2003년 헤지펀드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 당시 소버린은 SK(주) 지분을 매입한 뒤 최태원 회장 교체를 주장했다. 소버린이 확보한 지분 14%는 최대주주의 직접 보유 지분보다 많았다. SK(주)는 자사주를 처분해 우호 세력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오너일가의 경영권을 지켰지만 20여 년이 지나 일반주주의 권익이 향상된 지금 이 같은 방법이 허용될지 장담할 수 없다.
태광산업의 자사주 비중은 24.41%로 공시대상기업집단 가운데 5위를 기록했다. 태광산업 오너일가의 지배력은 공고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기준 오너일가 지분율은 54.53%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72.1%까지 상승한다. 현재 태광산업은 자사주 소각 계획은 없다.

미래에셋증권은 선제적으로 자사주 소각에 나서는 모양새다. 미래에셋증권은 2024~2026년 새 보통주 1500만 주를 매년 소각하기로 했다. 아울러 2030년까지는 발행주식의 1억 주 이상을 소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주주환원 정책을 진행하고 있다. 총 발행주식이 1억 5375만 주인 점을 감안하면 미래에셋증권이 목표치를 달성하면 미래에셋증권의 자사주 비중은 크게 낮아질 것으로 관측된다.
한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내용이 이번 상법 개정안에 포함될지는 미지수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발의된 상법 개정안 두 건에는 자사주 소각 의무에 대한 내용이 제외됐다. 이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이재명 대통령 목표인 코스피 5000을 위해서는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해야 한다”면서 “이미 보유하고 있는 자사주에 대해 소각 의무를 유예하는 등의 완화된 자사주 소각 의무화로는 코스피 5000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춘 상장사협의회 상무는 “기업 구조조정을 할 때 신주 발행대신 자사주를 활용해 재원을 활용하면 (주식 물량 측면에서) 기존 주주들에게 유리하다”면서 “단순하게 소각하면 주주한테 유리하다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전문가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자사주 처리 방안을 두고 정부가 직접 강제하는 것은 경영의 자유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 같다”면서 “자사주를 활용해 속도감 있게 재무구조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여당 내부에서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두고 더욱 치열한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에 합류한 박홍배 의원은 “다음주부터 공식 회의에 들어갈 예정”이라면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국·솔루엠…자사주 소각 의무화 전 분주한 상장사들
자사주 비중이 높은 상장사의 경우 자사주 소각은 경영권의 주요 이슈가 될 수 있다. 실례로 부국증권은 자사주 비중이 높은 회사로 꼽힌다. 지난해 말 기준 42.73%에 달한다. 오너일가의 지분율은 29.61%로 높지 않지만 자사주를 소각하고 나면 51.17%로 상승한다. 지배력에는 큰 문제가 없다.
다만 부국증권은 김중권 회장이 지분율 12.2%로 최대주주 신분이지만 동생 김중광 씨의 지분율 11.79%와 격차가 0.41%포인트에 그친다. 김중권 회장의 장남 김상윤 유리자산운용 부사장은 지난해 초 1.68%였던 지분율을 2.2%까지 끌어올렸다. 또 다른 3세로 분류되는 김도윤, 김정연, 김정진 씨 등은 각각 1.14%(기존 1.09%), 1.17%(0.83%), 1.03%(0.87%)로 끌어올렸다. 이들은 올해 들어서도 지분 매입을 지속하고 있다.
자사주 소각이 결정되면 기존 경영권을 가진 측에서 불리하다. 자사주를 우호지분에 매각해 지배력을 강화할 수단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오너일가는 공식적으로 부국증권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김상윤 부사장이 부국증권 자회사 유리자산운용에 근무하며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는 평가다. 자사주 소각 시 사촌 간 지배력을 두고 힘겨루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국증권 관계자는 오너일가 간 지배력을 둔 갈등 가능성에 “개인 신상에 관한 내용이라 확인이 어렵다”고 말했다.
자사주 의무소각 전 무리하게 지분 매각에 나섰다가 제동이 걸린 기업들도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솔루엠이다. 솔루엠은 지난 4월 전성호 대표이사 회장에게 211억 원 규모(119만 주)의 자사주를 매각하려 했으나, 처분 가격이 자사주 평균 매입 가격보다 낮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논란이 고조되자 솔루엠은 당초 계획을 취소하고 보유 자사주를 전량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상법 개정안에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포함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사회 충실 의무가 강화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지배주주 이익에 맞춘 자사주 활용이 제한적으로 바뀔 것”이라면서 “이 때문에 각 기업들마다 자사주 처리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호민 기자 donkyi@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