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끝난 ‘미지의 서울’은 법적 가족, 혈연가족을 넘어 실제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사회도 ‘가족’으로 인정해줄 때가 되었다는 논쟁의 불씨를 던졌다.
‘미지의 서울’은 마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보여준 수작이었다. 주인공은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 자매, 미지와 미래다. 이들은 성격도, 재능도, 태도도 딴판이다. 어린 시절부터 심장이 약해 병원 신세를 많이 진 미래는 내성적이고, 공부 잘하고, 똑 부러진 언니다. 서울에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며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동생 미지는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본인은 언니처럼 공부를 잘하지 못해 주목받지 못한다고 느끼지만 동네 사람들은 모두 이 밝고 낙천적인 미지를 편하게 생각하고 편하게 대한다. 작가는 서로의 그림자라고 해도 무방할 인물을 통해 어떻게 거울치료가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똑같이 생긴’을 고집한 것 같다. 우리는 안다.

들어가기 어려운 그 ‘좋은 곳’을 더 이상은 다닐 수 없다며 사표를 내려고 하는 미래의 직장에, 미지는 미래인 척하며 대신 근무해주다 좋아 보이기만 했던 언니 삶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느끼며 언니를 돕는다. 월급만 타면 대부분을 엄마에게 부치는 언니는 실은 잘나가고 있는 젊음이 아니라 직장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억울한 젊음, 삶의 짐을 내려놓는 법을 몰랐던 두려운 젊음이었던 것이다.
반면 시골에서 알바를 하며 자기 용돈이나 버는 미지는 은둔형 외톨이의 경험이 있다. 공부를 잘해 늘 주목받는 언니 옆에서 날마다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어느 날 달리기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지는 주목받는 육상선수가 되었다.
언니 미래가 부럽지 않은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발목부상을 입으며 선수로서 좌절해야 했던 미지는 삶에서도 좌절했다. 미지는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오지 못했다. 가능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 미지를 일차적으로 구해준 것은 할머니의 사랑이었다.
“사슴이 사자를 피해 도망치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아먹힐까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싸우는 거잖아. 미지도 살려고 숨은 거야. 암만 모양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이 드라마에서 자애로운 할머니는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사랑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까봐, 그 무엇도 될 수 없을까봐 불안에 떠는 막막한 미지에게 할머니가 말한다.
“그럼 어떠냐, 그냥 밥 잘 먹고, 가끔 할머니 말동무 해주면서 살면 되지.”
미지가 서울에서 미래로 살고 있는 사이, 미래는 시골에서 미지로 살며 딸기농장 알바를 하게 되는데 거기서 만난 남자도 주목할 만하다. 할아버지의 후원으로 성장한 이 남자는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졸업도 하지 않고 자기 일을 찾아 학교를 떠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학비를 대준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때 손주의 선택을 이해하며 품어준 할아버지의 말씀에 또 하나의 시대정신이 보인다.
“졸업장, 그거 원래 일 시작하려고 따는 건데, 이제 일 시작했다며? 끝을 본 거지, 그럼. 왜 미련하게 종점까지 가. 너 내릴 때 내리는 거지.”
은둔형 외톨이, 왕따, 졸업장보다는 실용적 선택,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까지, 이 드라마는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회문제들을 펼쳐놓으며 논쟁거리를 던지고 있었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