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일 민주통합당 고위정책회의에 참석한 박기춘 원내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모임도 ‘말의 성찬’에 그쳐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전직 당대표와 원내대표, 대선 후보, 국회의장단 등이 총망라된 상임고문단은 민주당 내에서 가장 입김이 센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대위 구성 방안을 둘러싸고 당내 이견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뤄진 만남이라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민주당이 발표한 이날 모임의 결과는 이랬다.
“대선 패배에 대한 모든 책임은 민주통합당에게 있다. 국민들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민주당의 위기는 단순한 위기가 아닌 존폐의 위기임을 절감해야 한다. 당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로부터 용서와 기회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치열한 반성과 근본을 돌이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비대위원회는 첫째 차기 지도부를 세우는 전당대회 준비에 전념하고, 둘째 총선·대선에 대한 엄정한 평가 작업을 수행해야 하며, 셋째 큰 충격 상태에 있는 국민들과 지지자들을 ‘힐링’하는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비대위원장은 사심 없이 당을 위해 헌신해야 할 사람으로 추천되어야 하며, 당 내외 의견을 모아 잘 추천하기 바란다.”
처절한 반성 속에 뭔가 대단한 쇄신 결의가 이뤄진 것 같지만 결론은 아무 것도 없었다. 비대위원장을 내부 인사가 맡을지, 아니면 외부 인사에 맡길지, 또 비대위원장을 경선을 통해 뽑을 것인지, 아니면 합의추대 방식을 취할 것인지. 모임이 끝난 뒤에도 민주당의 향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결국 원내대표와 상임고문단이 만났는데도 ‘말의 성찬’에 그쳤던 것이다. 이는 민주당이 더 이상 스스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다시 말해 자정 능력을 상실한 집단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비대위 구성이 지지부진한 것은 이번 대선 패배를 통해 중병에 걸렸음이 분명해진 민주당이 스스로 환부를 도려낼 능력도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대선 패배 후 민주당은 비대위 구성을 통해 뼛속까지 다 바꾸는 일대 혁신에 나설 것처럼 보였지만 이 같은 구상은 결국 말잔치로 끝났다. 비대위원장을 누굴 세울지를 둘러싸고 친노(친노무현)그룹과 비노그룹이 접점을 찾지 못하면서 결국 비대위의 역할이 ‘당 쇄신을 주도하는 기구’에서 ‘전당대회 때까지 임시로 당을 관리하는 기구’로 쪼그라들게 된 것이다.
당초 문재인 전 대통령선거 후보는 대선 당시 영입했던 안경환 서울대 교수를 비대위원장으로 낙점했으나, 비노그룹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안 교수가 친노그룹과 가깝다는 게 이유였다. 이후 비노그룹 일각에서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비대위원장으로 세워 쇄신을 이끌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이번엔 친노그룹 일부가 반기를 들었다. 윤 전 장관이 구여권 출신으로 정체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양측의 주장이 맞서면서 ‘비대위원장 추대’는 물 건너갔고 결국 경선 방식을 취하게 됐다. 또 비대위는 ‘혁신형’이 아닌 ‘관리형’으로 지위가 축소됐고, 당 쇄신은 3월 전당대회에서 뽑힐 새 지도부가 주도하도록 정리됐다.
당 쇄신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여겨졌던 비대위의 위상이 더없이 초라해지게 된 것을 두고 당 안팎에선 “스스로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다’고까지 말했던 민주당이 기득권을 포기할 의지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싸늘한 평가가 나온다.
오랜 당료 생활을 거친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비대위를 꾸린다는 것은 국회의원을 비롯해 민주당 사람들 모두가 ‘그동안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우리의 운명을 맡기겠다’는 의미인데, ‘관리형 비대위’라고 하면 결국 이런 구상이 무산됐다는 얘기”라며 허탈해 했다. 이 당직자는 “전당대회를 통해 대선에 대한 평가 작업이 이뤄지겠지만, 전대의 특성상 계파갈등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면서 “외부 인사가 비대위원장을 맡아 쇄신을 이끌고, 민주당은 고통스럽더라도 이에 따라주는 모양새를 보여줘야 하는데 국민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정진우 당 전략기획위원회 부위원장도 ‘국민정당추진네트워크’ 주최 토론회에서 “장수는 전장에서 패배하면 일단 먼저 목을 내놔야 한다”며 “책임질 건 책임지고 평가할 건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은 책임론을 따질 때가 아니고 단결하고 화합할 때’라는 말도 마음에 안 든다”고 지적했다.
비대위 구성 논란과 함께 대선 패배 책임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민주당의 자정능력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안철수 전 대선 후보의 멘토로 알려진 법륜 스님이 한 라디오에 출연해 “안철수 후보가 대선에 나갔다면 이기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애초에 문재인 전 후보를 내세운 게 패착이었다고 주장하자 민주당 내에서 즉각적인 반발이 나왔다.
김기식 의원이 “안 전 후보로 냈으면 무조건 이겼고 문 후보가 된 것 자체가 패배를 이미 예정한 것이라고 하는 건 대단히 주관적인 평가”라고 반박했다. 친노그룹 내에서도 불쾌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안 전 후보를 도왔던 김민전 경희대 교수가 다시 한 번 “안 전 후보가 사퇴하는 날조차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의 양자대결에서 앞서고 있었다. 안 전 후보가 더 경쟁력이 있었다”고 반박하는 등 볼썽사나운 논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이 대선 패배 책임을 통감하고 기득권을 내려놓는 쪽으로 가기보다는 해묵은 계파갈등을 이어가자 “지지자들은 ‘멘붕’에 빠졌는데 민주당 의원들만 멀쩡한 것 같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정치평론가는 “말로는 쇄신을 얘기하면서도 민주당은 여전히 손바닥만한 기득권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다”며 “특히 정치 쇄신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쪽지 예산’이나 챙기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민주당 의원들에게서 긴장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 평론가는 “다음 총선이 2016년에나 치러지기 때문에 민주당 의원들이 이번 대선 패배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라며 “이런 식으로 적당히 넘어간다면 민주당은 결국 외부의 힘, 즉 국민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탄핵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
“자숙은 없고 자유만 만끽”
▲ 사진제공=문재인 |
이때까지만 해도 문 전 후보의 행보에 대해 이런저런 정치적 해석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트위터를 통해 계속해서 일련의 메시지를 쏟아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허탈감에 빠진 지지자들을 위로하는 글부터 모처럼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된 소회, 독서 후 감상, 현안에 대한 의견 등 내용도 다양했다. 평소 같으면 별다른 시빗거리가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지자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대선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인지라 이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 민주당 의원은 최근 기자들과의 사석에서 문 전 후보의 ‘트위터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의원의 주장은 한마디로 “문재인을 지지해 준 사람들은 낙담하고 죽어나가고 있는데, 정작 패장은 너무 한가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의원은 “등산을 다녀와서 ‘참으로 오랜만의 자유였고, 명상의 시간이었다’고 글을 올리고, 폭설로 인해 집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을 두고 ‘어딜 갈까 말까 망설임을 없애 주는 기분 좋은 유폐’라고 쓰기도 했다”며 “문 전 후보가 패배의 상처가 가장 클 것이고, 따라서 그 자신 역시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해고 노동자를 비롯해 극한 상황에 내몰려 정권교체만을 학수고대했던 사람들이 느끼는 참담한 심정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한가한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된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문 전 후보의 글에서 더욱 정치적인 냄새가 짙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1월 2일 문 전 후보는 헬렌 켈러의 말을 인용해 “하나의 행복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그 닫힌 문만 너무 오래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비관주의자들은 별의 비밀을 발견해 낸 적도 없고 지도에 없는 땅을 항해한 적도 없으며, 영혼을 위한 새로운 천국을 열어준 적도 없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당내에서 친노 책임론이 집중 제기되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정치적인 해석을 낳기에 충분했다.
지난 12월 30일 광주 방문, 1월 1일 김해 봉하마을 방문 등도 구설수에 올랐다. 광주 방문에는 대선 선대위 주요 인사들과 광주ㆍ전남 국회의원들이 대거 동행했고, 문 전 후보는 이들과 함께 국립 5ㆍ18 민주묘역에 참배한 뒤 지지자들을 대동하고 무등산에 올랐다. 김해 방문 때에는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와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 친노 인사 1000여 명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했다. 문 전 후보 측은 이 같은 최근 행보에 대해 “지지자들을 위로하고 대선 과정에서의 고마움을 표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를 지켜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민주당 한 당직자는 “질 수도 없고, 져서도 안 되는 선거에서 패한 마당에 문 전 후보가 친노그룹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은 지지자들을 더욱 힘 빠지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