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송금설의 출발은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의 국회 국정감사 증언에서 비롯됐다. 엄 전 총재는 지난달 25일 정무위 국정감사에서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이 ‘현대상선이 사용한 돈이 아니기 때문에 갚을 수 없다’고 했으며 ‘정부에서 대신 갚아주어야 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현대상선이 사용한 ‘돈’이란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6월 7일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으로부터 당좌대월 형식으로 지원받은 4천억원과 같은 달 28일 운영비 명목으로 대출받은 9백억원을 말한다. 대출금 4천9백억원을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정확히 4억달러가 된다. 다시 말해 현대상선이 산은으로부터 대출받은 돈은 사실 정부가 사용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4억달러 대북송금설이 나왔다. 물론 현대와 정부관계자들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엄 전 총재의 발언을 통해 “대북송금 사실이 확인됐다”며 청와대와 현대를 향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대출금의 인출과정과 대북송금 경로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도 내놓고 있다. 한나라당은 특히 이 과정에서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폭로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상선은 왜 거액의 돈을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산업은행으로부터 지원받아야 했을까. 또 이 돈은 정말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정상회담의 대가로 북한에 지불됐을까. 복잡한 대북송금설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보자.
▲ ''북으로..! 지난 9월 26일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가 진상조사단과 함께 정부의 4억달러 대북지원 의혹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im@ilyo.co.kr | ||
우선 현대상선의 긴급대출에 대해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이 이를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당시 외환은행장이었던 김경림 외환은행 이사회 의장은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천9백억원을 긴급 대출해줬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밝혔다. 당시 현대상선을 담당했던 이연수 전 외환은행 부행장도 언론을 통해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과는 절친한 사이인데 그런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으며 (나도) 이제 와서야 알았다”고 말한 바 있다.
금융전문가들에 따르면 특정기업이 주채권은행을 배제한 채 국책은행으로부터 거액을 대출받은 사례는 금융관행 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또한 현대상선에 대한 산은의 대출이 전격 처리됐다는 점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산은은 지난 2000년 6월5일 현대상선으로부터 당좌대월형식의 긴급 대출신청을 받는다. 이로부터 이틀 뒤인 6월7일 산은은 여신담당본부장 직권으로 당좌대월 4천억원을 곧바로 승인해줬다.
거액의 돈을 이틀 만에 대출해 준 것은 상식 밖이라는 게 금융시장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대출이 파격적이었다는 점을 제쳐두고서라도 이를 대출받은 현대상선이 자금을 비정상적으로 운용했다는 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현대상선은 2000년 6월7일 4천억원을 대출을 받은 다음날인 6월8일부터 같은 해 8월 말까지 현대건설에 CP를 매입해주는 방식으로 1천억원이 넘는 돈을 지원해줬다.
즉 유동성에 어려움을 겪었던 현대상선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계열사를 지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유동성 위기 때문에 거액을 대출받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대상선은 또한 3개월 시한의 긴급대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직도 갚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믿는 구석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산은은 현대상선에 대해 2000년 6월7일 3개월 만기의 당좌대월 4천억원을 대출해준다. 같은 달 29일 운영자금 명목으로 9백억원을 추가로 지원해줬다. 그러나 현대상선은 같은 해 10월28일까지 총 1천7백원억원을 갚았을 뿐이다. 운영자금으로 빌린 9백억원 중 1백억원은 올해 2월26일에야 갚았다.
결국 현대상선은 당좌대월 2천3백억원과 운영자금 8백억원을 아직도 갚지 않고 있는 것. 이에 대해 산은측은 “(현대상선으로부터) 자금을 일시에 회수할 경우 부도가능성이 있고 올해 10월이면 자동차 전용선 매각대금 15억달러를 통해 대출잔액 전액을 회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산은과 현대측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대북송금설이 힘을 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현대상선의 대출금 4천9백억원의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현대상선측은 “산은으로부터 받은 당좌대월 4천억원 가운데 1천억원은 그해 6월에, 나머지 3천억원은 그해 7∼8월에 만기도래한 어음상환 등에 사용했으며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산은측도 현대상선이 기업어음(CP) 상환 1천7백40억원, 선박용선료 1천5백억원, 선박금융 5백90억원 등에 대출금을 썼다고 밝혔다. 현대상선측은 거래기업이나 15개 거래은행들의 불이익 등을 고려해 지금 당장 자료를 공개할 수 없으나 정치권에서 국정조사 등을 통해 정식으로 자료를 요청하면 이를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현대상선에 당좌대월을 승인한 박상배 현 산업은행 부총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원받은 바로 그날(2000년 6월7일), 현대상선이 4천억원을 모두 뽑아 썼다”고 밝혔다. 이는 2000년 6월 말까지 당좌대월 4천억원 한도 중에서 1천억만을 사용했다는 현대상선측의 해명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증언이다. 박 부총재의 발언이 터져 나오자 현대상선은 이후 말을 바꿨다. 현대상선측은 29일 “당일 4천억원을 인출한 것은 사실”이라고 서둘러 해명했다.
▲ 지난 2000년 6.15 정상회담 때 만나 포옹하는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 | ||
산업은행의 현대상선에 대한 거액대출 의혹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산은은 현대상선에 당좌대월 4천억원을 지원하기 한 달 전인 5월18일에 당좌대월 1천억원을 별도로 지원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이는 앞서 현대상선측이 당좌대월 4천억원 중 1천억원만 빌려 사용했고 반기보고서에도 이같이 기록돼 있다고 해명한 것에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즉 반기보고서에 기재된 1천억원은 2000년 5월에 지원받은 1천억원일 뿐이고, 6월의 당좌대월분 4천억원은 통째로 사라졌다고도 주장이 제기될 수 있는 것. 이에 대해 현대상선측은 “산은이 지원한 1천억원은 (2000년) 3월 말 현재 2천9백25억원이었던 당좌대월 한도를 채권단 합의에 따라 1천억원 늘려준 것일 뿐이고 6월28일 모두 갚았다”면서 “다만 그 대출액이 반기보고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실수일 수 있다”고 해명했다. 결국 현대상선측은 자사가 작성한 보고서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의혹투성이인 산은의 현대상선 대출금 4천9백억원. 그렇다면 이 돈이 정말로 북한으로 흘러 들어갔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이나 물증은 없다. 한나라당 대북뒷거래진상조사단 소속 의원들은 “이 돈이 국정원에 의해 여러 차례 세탁된 뒤 북한으로 송금됐을 것”이라면서 “금감원이 계좌추적을 하면 단번에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조사할 게 없다”고 버티고 있어 의혹은 점점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