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국보’의 기세가 멈추지 않는다. 흥행수입이 150억 엔(약 1400억 원)을 돌파하며 일본 영화 흥행사에 새 기록을 세웠다. 지금까지 일본 실사영화 중 100억 엔을 넘긴 작품은 ‘춤추는 대수사선 THE MOVIE 2(2003)’ ‘남극 이야기(1983)’ ‘춤추는 대수사선 THE MOVIE(1998)’ 등 단 세 편뿐이다. 이 가운데 ‘국보’는 ‘남극 이야기(110억 엔)’를 제치고 일본 실사영화 흥행 순위 2위에 올랐다. 일본 영화계는 애니메이션이 압도적 강세를 보여 온 만큼, 실사영화가 100억 엔을 돌파한 것은 무려 22년 만이다.
‘국보’는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천애 고아가 된 소년 기쿠오가 가부키 명배우 하나이 하지로에게 입양돼 그의 아들 슌스케와 경쟁하며 기예의 길을 걷는 이야기를 그린다. 기쿠오의 ‘재능’과 슌스케의 ‘핏줄’의 대비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냈다.
이번 성공은 일본 영화계의 히트 공식을 깼다. 젊은 층 겨냥, 인기 만화 원작, 방학·연휴 개봉 같은 정석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쾌거를 이룬 것. 상영시간도 175분으로 긴 편이다. 그러나 “3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라는 반응과 함께 중장년층은 물론, 가부키에 관심이 없던 MZ세대까지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전문가들은 “숏폼 영상과 배속 시청이 일상화된 시대지만, 작품이 좋으면 긴 상영시간도 관객들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진단했다.

가부키를 향한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 한산했던 공연들이 성황을 이루는 등 영화 파급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한 편의 영화가 지역 활성화와 전통예술 재조명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사회현상이라 부를 만하다”고 평가했다.
#‘국보’가 던진 화두 “핏줄이냐 실력이냐”
가부키는 17세기 초 에도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본 전통공연예술이다. 노래와 춤, 연기가 어우러진 종합 연극으로 남자 배우만이 무대에 오를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특정 가문에서 배우를 양성하고 이어가는 세습 구조다. 선대가 쓰던 예명(芸名)뿐 아니라 역할까지 물려받는다. 예를 들어 ‘이치카와 단주로’ ‘나카무라 간자부로’ 같은 유명한 이름은 대를 이어 세습돼왔다.
가부키가 세습되는 이유는 예술적 스타일과 기술을 안정적으로 전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 집안이 오랜 세월 같은 연기·동작·발성·레퍼토리를 훈련해 ‘그 가문만의 스타일’을 지켜왔다. 이런 구조 덕분에 몇몇 거물급 배우들은 아들·손자까지 거대한 패밀리를 이루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반대로 말하면 이 패밀리 밖에 있는 사람은 가부키 극장에서 주역급으로 발돋움하기가 쉽지 않다. 요컨대 일본에서 가부키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것은 곧 부와 명예를 물려받은 ‘도련님’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친자에 의한 세습이 유지되려면 먼저 가부키 집안에 남자아이가 태어나야 한다. 전후부터 근년까지는 기적적으로 대부분의 거물급 배우들이 결혼해 남자아이를 얻었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가 배우의 길을 택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사춘기 때 잠시 거부하더라도 결국 배우가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다른 길을 선택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세 번째 문제는 배우가 된 아이가 과연 아버지와 견줄 만한 배우로 성장할 수 있느냐다. 이것이 가장 어렵다. 배우가 되더라도 대성할 수 있을지는 결국 실력과 운에 달려 있다. 남자아이가 태어나지 않거나 배우로 성장하지 못하면, 혈통 중심의 구조는 언젠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영화 ‘국보’는 이러한 가부키계의 혈통주의를 둘러싼 논의를 다시금 촉발하고 있다. 가부키계의 혈통주의에 대한 의문은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돼 왔다. 전통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지만, 여성 참여가 어렵고 외부 인재 진입 장벽 등이 주된 비판 포인트다. 폐쇄성이 젊은 층 유입을 막는다는 지적도 많다. 일본 소셜미디어(SNS)에서도 “가부키는 왜 남자만? 왜 가문 사람만 하느냐?”라는 질문이 점점 더 자주 보인다.
‘국보’의 히트는 바로 그 논의를 대중에게 확산시키는 매개 역할을 했다. “핏줄이냐, 실력이냐”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활발하다. 가부키계의 혈통 중시는 일본 전통예술의 핵심 관습이자 문화적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전통을 어떻게 현대화하고 개방할지를 두고 내부·외부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변화의 움직임도 감지된다. 최근 몇 년 사이 극단 연구생 제도나 연수 제도 등을 통해 비(非)가부키계 출신이 입문해 두각을 나타내는 사례가 조금씩 늘고 있다. 여성도 뒤늦게나마 가부키 연구나 일부 실험적 공연에 참여하는 경우가 생겼다.
영화 ‘국보’ 속 주인공 기쿠오는 순혈주의 가부키 세계에서 ‘입양된 외부인’으로 예술혼을 불사른다. 혹시 재일 한국인 감독의 관점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지난 9월 21일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국보’ 기자회견에서 이상일 감독은 “그 부분은 상상에 맡기겠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국보라는 작품에 한정해 말씀드리자면, 사회와 집단에서 경계에 있는 아웃사이더를 표현하고 싶었다. 사회 변두리에 눈이 좀 간다. 아마 거기에 ‘자이니치(재일 한국인)’인 제 아이덴티티가 일부 연결돼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답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