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유치 vs 이민단속’ 트럼프 핵심 정책 충돌…지지층 결집해 중간선거 승리 정치적 노림수도
[일요신문] 미국 조지아주에서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지난 9월 4일(현지시각), 불법 체류 근로자를 색출해낸다는 명분으로 출동한 미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이 급습한 곳은 다름 아닌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이었다. 이날 체포된 근로자는 475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한국인은 360명가량이었다.
이번 사건이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유는 단일 현장에서 벌어진 불법 체류자 단속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라는 점, 그리고 현대차와 같은 대기업을 상대로 단속이 벌어졌다는 데 있었다. 더욱이 막대한 대미 투자를 단행한 외국 기업을 상대로 이처럼 무지막지한 작전을 벌였다는 점은 비난을 넘어 우려까지 사고 있다.
또한 트럼프의 핵심 의제 두 가지(외국인 투자 유치 vs 이민 단속)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점 역시 혼란을 부추기고 있긴 마찬가지다. 이에 미국에 투자하고 있는 외국 기업들은 ‘다음은 혹시 우리 차례’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상태다. 조지아주 민심 역시 찬반으로 갈리고 있는 만큼 이번 사태는 지역 사회는 물론이요, 한미 양국 모두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9월 4일 미 조지아주 엘라벨에 위치한 현대차-LG엔솔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체포된 근로자는 475명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한국인은 360명가량이었다. 사진=이민세관단속국 홈페이지 캡처조지아주 엘라벨에 위치한 현대차-LG엔솔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실시된 이번 단속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단일 현장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단속이었다. 이 공장은 브라이언 켐프 주지사(공화당)가 앞장서서 “우리 지역 경제에 큰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던 프로젝트로, 조지아주 역사상 최대 경제 개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가 조지아주에 투자한 총 126억 달러(약 17조 5000억 원) 가운데 일부에 해당됐다.
사정이 이러니 이민 단속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배신감에 황망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비난 여론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은 불법 체류 외국인이었고, ICE는 자기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또한 사건 며칠 뒤인 일요일 밤에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미국에 투자하고 있는 외국 기업들을 겨냥해 “여러분의 투자는 환영한다. 숙련된 기술 인력을 ‘합법적으로’ 데리고 와서 세계적 수준의 제품을 만들길 바란다”라는 경고성 메시지도 남겼다.
사실 여기에는 ‘제조업 부활’과 ‘일자리 창출’을 약속한 트럼프의 비전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외국인 노동자 대신 미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고용해 제조업을 부활시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호들은 이런 트럼프의 바람과는 어째 다른 듯하다. 최근 발표된 고용 보고서에 따르면 8월 신규 일자리는 단 2만 2000개 증가하는 데 그쳤고, 실업률은 4.2%에서 4.3%로 소폭 상승했다. 이는 고용 증가세가 둔화됐음을 시사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경제학자들은 “엄격한 이민 단속이 노동시장 신규 진입자 감소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EY(언스트앤영) 수석 이코노미스트 역시 “더 엄격해진 이민 정책이 노동 공급을 제약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의 두 핵심 의제가 서로 맞부딪치면서 혼란을 자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를테면 한편으로는 국내 제조업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외국 기업의 미국 투자를 확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이민 단속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NBC뉴스’는 “미국 내 외국인 노동자 수를 줄이려 하면서도 한국으로부터는 수백억 달러 투자를 받으려고 한다”면서 “이번 단속은 백악관이 외국인 투자 유치를 확대하려는 노력과 상반되는 작전이었다”고 지적했다.
이런 논란을 감수하고 트럼프가 이번 작전을 두둔하는 배경에는 정치적 노림수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즉, 핵심 지지층을 결집해 내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포석을 깔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실제 “외국인 불법 체류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트럼프의 메시지는 그간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마법과도 같은 주문이었다. 때문에 이번 대규모 단속은 지지자들에게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상징적인 메시지로 비칠 수 있고, 결국 내년 중간선거 캠페인에서 강력한 무기로 작용할 수 있다.
미 조지아주 현장의 우리 근로자들이 미국 당국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이 공개돼 충격을 줬다. 사진=이민세관단속국 홈페이지 캡처반면, 잠재적 역풍을 고려해야 한다는 경고성 목소리도 있다. 무엇보다 외국 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로 혜택을 보고 있는 조지아주나 앨라배마주 같은 남부 지역이 강경한 이민 단속으로 피해를 입을 경우 지역 경제에 미칠 영향이 그렇다. 공장 건설이 지연되거나 일자리 감소가 현실로 나타날 경우 아무리 친공화당 성향 지역이라고 해도 해당 지역 주민들의 불만은 커질 수 있다.
실제 조지아주는 선거 때마다 대표적인 스윙스테이트로 꼽히는 지역이다. 근 몇 년간 대선과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접전을 펼쳤다. 때문에 이 지역에 투자한 외국 기업과 그로 인한 경제 성장 혜택을 본 지역 주민들이 이번 사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골프 여행지나 카누 여행지로만 알려져 있던 시골 마을인 엘라밸에 85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배터리 공장이 지어진다는 사실은 지역 주민들에게 커다란 기대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아직 공장이 정식 가동되지는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 사태로 지역 경제는 뚜렷하게 위축되고 있다. CNN 보도에 따르면, 가장 눈에 띄게 타격을 입은 곳은 공장 근로자들을 주고객층으로 삼아온 지역 상점들이다. 가령 엘라벨의 ‘비엣흐엉’ 아시아 식료품점은 단속 직후부터 한국인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겨 울상이다. 이 가게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90%는 한국산으로, 주된 손님은 한국인 근로자들이었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새리 렌츠(51)는 “아침마다 일터로 가기 전에 무리 지어 와서 담배를 피우거나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한국인들 덕분에 아이스크림을 많이 비축해 두었다. 그런데 단속이 벌어지고 난 후부터는 찾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서 “한국 사람들이 없으면 돈을 벌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이 침체가 장기화될까 걱정이다”고 덧붙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공장 건설이 지역 주민들 간에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기도 하다고 CNN은 보도했다. 겉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이주민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하는 비즈니스와 대규모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마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이를 불안해하는 주민들도 있다는 것이다. 렌츠가 운영하는 아시아 식료품점도 그 한 예다. 일부 지역 주민들은 이 식료품점이 새로 유입된 아시아권 노동자들을 위한 곳이라는 이유로 반감을 품고 있다. 심지어 가게에 들어와 욕설을 퍼붓고 나가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렌츠는 “그들은 내 가게를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일부 주민들은 아시아 식품이 미국 식품과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못마땅해 한다고 전했다.
트럼프가 논란이 많은 이번 작전을 두둔한 배경에는 핵심 지지층을 결집해 내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포석도 깔려있다. 사진=AP/연합뉴스이처럼 여러 면에서 이번 대규모 단속이 지역 경제에 미칠 파장은 적지 않다. 공장 완공 일정은 물론이요, 현대차의 미국 내 투자 계획 역시 지연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싱가포르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전공하는 류용욱 조교수는 “이번 지연이 결국에는 조지아 지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들 역시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이번 사건은 한국은 물론이요, 미국에 들어와 있거나 들어올 예정인 외국 기업들에게 불안한 신호를 보냈다. ‘투자는 하되, 특별한 대우는 기대하지 말라’는 신호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전 미국 상공회의소 산하 한미 비즈니스 위원회를 이끌었던 국제 비즈니스 컨설턴트 타미 오버비는 뉴욕타임스에 “이들은 관리 당국으로부터 혼란스런 메시지를 받고 있다. ‘우리 돈은 원하지만, 우리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이 메시지는 아시아 기업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라고 분석했다. 타임지 역시 전문가들의 의견을 빌려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이민 단속이 앞으로 기업 활동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이민 정책이 오히려 일자리 창출을 비롯한 경제 부흥 목표를 저해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카토 연구소의 콜린 그래보는 “이번 사건은 어떤 식으로든 위축 또는 억제 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으며, 적어도 트럼프 행정부가 원하는 투자 유형을 기업들이 재고하게 만들 것”이라고 평가했다.
신고자 토리 브래넘은? 하원의원 출마 선언, 넉 달 만에 400억 모금
연방 당국은 이번 사건이 수개월에 걸친 고용 관행 조사 결과라고 설명했지만, 수색 영장에는 이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실 발부된 영장에는 특정 표적으로 지목된 네 명의 히스패닉계 남성의 이름만 적시돼 있었다.
미 해병대 출신이자 열렬한 MAGA 지지자인 토리 브래넘. 사진=토리 브래넘 페이스북 캡처이 네 명을 신고한 사람은 다름 아닌 토리 브래넘(47)이라는 열렬한 MAGA(미국 우선주의) 지지자였다. 미 해병대 출신이자 총기 교관이었던 브래넘은 자신이 ‘공장에 현지 근로자가 충분히 고용되지 않고 있다’는 신고를 넣었다고 주장하면서 “내가 (트럼프에게) 투표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많은 불법 체류자들을 없애기 위해서 투표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비난과 조롱 또한 쏟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의 SNS에는 “트럼프의 경제 어젠다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 가운데 하나와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라고 비난하거나, “일자리 회귀 정책을 지지한다면서 현대차 조지아 공장을 날려버렸다고 기뻐하다니. 475명 체포, 4만 개 일자리 증발. 이게 어떻게 아메리카 퍼스트인가? 그건 경제적 자살이다. 당신은 모순덩어리 광대일 뿐이다”라며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당신의 무지한 행동이 미국과 한국 사이에 심각한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 “백인 우월주의나 MAGA 혐오 때문에 수십억 달러 규모 계약을 망치려면 대체 얼마나 어리석어야 하나. 당신은 게슈타포다”라며 한심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브래넘은 이런 비난 메시지들이 대부분 10대들로부터 온 미성숙한 의견이라고 치부하며 웃어넘기고 있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전국에서 살해 협박 편지와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나라를 위해 복무했고, 누가 날 침묵시키기 전까지는 끝까지 싸우겠다”고 거듭 주장했다. 오히려 미국 근로자를 위해 불합리한 근로 환경을 폭로했는데 왜 자신을 괴롭히고 있냐며 억울하다는 주장이다.
한편에서는 브래넘이 이번 단속을 자신의 선거운동에 활용한다며 비난하기도 한다. 몇 달 전 상원의원 공화당 경선에서 낙마했던 브래넘은 내년 조지아주 연방 하원의원 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때문에 그의 이런 행보가 내년 선거를 목표로 삼은 정치적 계산이라는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실제 온라인에서 ‘MAGA 카렌’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브래넘은 자신을 ‘아메리카 퍼스트 후보’라고 홍보하고 있다. 그는 “워싱턴에서 일반 시민, 재향군인, 가족들을 대표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보다 현역 군인, 현역 군인의 배우자, 현역 군인 엄마로서의 삶을 이해한다. 소규모 사업체 운영자이자 여성으로서의 삶도 이해한다. 워싱턴에는 더 많은 보수적 여성이 필요하다! 때문에 내가 가장 적합한 후보자라고 확신한다”라고 주장했다.
브래넘이 5월 15일에 개설한 선거 페이지의 후원 모금액은 최근 기준 약 3000만 달러(약 420억 원)에 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