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경기장을 차로 이동할 수 있었던 2022년 카타르 월드컵과 달리 이번 북중미 월드컵은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펼쳐진다(카타르 전체 면적은 미국 코네티컷주보다 작다). 경기장은 태평양 연안의 LA, 밴쿠버에서부터 대서양 연안의 뉴욕, 토론토까지 넓게 흩어져 있으며, 무려 네 개의 서로 다른 시간대 영역에 걸쳐 있다. 거리로 따지면 동서로 약 4300km, 남북으로 약 4000km다. 가장 긴 이동거리는 밴쿠버에서 마이애미로 날아갈 때다. 이 경우 이동거리는 무려 약 7246km, 비행시간은 6시간에 달한다.
이는 선수들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일부 대표팀 선수들은 최대 19개 시간대를 넘나들면서 여러 도시를 계속 이동해야 한다. 서부 해안에서 격렬한 경기를 치르고 불과 며칠 뒤 동부 해안으로 이동해 다음 경기를 준비할 경우 몸은 여전히 서부 시간에 맞춰진 상태에서 동부 시간에 맞춰 경기를 뛰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단순한 피로감을 넘어 축구 선수의 생체 리듬을 붕괴시킨다고 지적한다. 생체 리듬은 선수의 수면, 집중력, 근육의 폭발력, 반응 속도 등을 지배하는 체내 시계에 다름 아니다. 0.1초의 판단과 수mm의 정밀함으로 승부가 갈리는 축구 경기에서 시차로 인한 생체 리듬 교란은 치명적인 경기력 저하를 유발할 수 있다. 이번 월드컵 무대에서 강팀이 무너지고 약팀이 이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전술이 아닌 이동거리에 따른 피로 누적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이동거리는 어떻게 될까. 영국의 저명한 스포츠 매체와 외신들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조별리그 대진표와 일정에 따른 '국가별 이동거리의 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FIFA는 조별리그 이동거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경기장을 인접 도시별로 묶는 ‘지역 클러스터’ 방식을 도입했다고 밝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뽑기 운은 작용했다.

이외에도 조별리그 기간 동안 장거리 대륙 횡단 레이스를 펼쳐야 하는 참가국들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약 5060km), 알제리(약 4783km), 체코(약 4524km), 남아프리카공화국(약 3927km), 콩고민주공화국(약 3653km), 캐나다(약 3354km), 벨기에(약 3298km), 에콰도르(약 3236km), 미국(약 3106km) 등이다.
반면, 대진운 덕분에 한 지역에 조용히 머무는 팀들도 있다. 디펜딩 챔피언인 아르헨티나는 댈러스와 캔자스시티를 오가며 조별리그 기간 동안 단 742km 정도만 이동하면 된다. 강력한 우승 후보인 프랑스는 운이 더 좋다. 조별리그 기간 내내 미국 동부 해안에 머물면서 단 약 537km만 이동하는 일정을 소화하면 된다.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두 경기를 치른 후 몬테레이로 이동하는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이동거리 역시 약 645km 정도로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다.
더 큰 문제는 조별리그가 끝난 이후부터 시작된다. 본격적인 토너먼트에 돌입하면 승리한 팀들이 어느 도시로 이동하게 될지 예측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경기를 이길 때마다 수천km를 날아가야 하는 복불복 일정이 기다리고 있어 ‘진정한 우승은 전술적 완성도가 아니라 체력적 생존 능력이 강한 팀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에 선수들 사이에서도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선수협회(PFA)의 마헤타 몰랑고 CEO(최고경영자)는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축구 팬들은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월드컵 무대에서 멋진 기량을 뽐내길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이번 대회는 축구 경기가 아니라 ‘적자생존의 서바이벌 게임’이 될 듯하다”며 규탄했다.
특히 월드컵 규모 확대로 사상 처음 본선 무대를 밟게 된 우즈베키스탄, 요르단, 카보베르데, 퀴라소 등에게 이런 문제는 더욱 치명적이다. 이들은 대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축구 강국들에 비해 체력 관리 및 회복을 위한 스포츠 과학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스포츠 과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장거리 비행 후 발생하는 신체 현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여행 피로’, 둘째는 ‘시차증(제트랙)’이다. ‘여행 피로’는 비행기 내부의 건조한 공기로 인한 탈수 현상과 이동 과정에서의 수면 부족으로 발생한다. 이는 다행히 도착 직후 하루 이틀 푹 쉬면서 수분을 보충하면 어느 정도 회복된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시차증’이다. 이 경우에는 인간의 뇌와 장기에 새겨진 시간 감각을 강제로 뒤흔들기 때문에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하더라도 몸이 반응하지 않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 국가들은 이른바 ‘차이트게버’라는 과학적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이를테면 생체시계를 외부 환경 신호로 동기화시키는 방법이다. 출발 수일 전부터 목적지 시간에 맞춰 조명을 조절하거나, 식사 시간과 운동 시간을 변경해 뇌를 속이는 일종의 ‘사전 적응’ 훈련이다. 또한 도착 직후에는 강도 높은 훈련을 전면 배제하고 압박 스타킹을 착용한 상태로 가벼운 마사지와 리커버리 세션을 일주일 가까이 진행한다.

이는 단순히 더운 날씨를 의미하지 않는다. 운동하기 위험한 수준의 환경이라는 뜻이다. 특히 휴스턴, 마이애미, 몬테레이는 전문가들이 반복적으로 지목하는 ‘위험 도시’들로 꼽히고 있다.
폭염이 무서운 이유는 체력만 저하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체온이 39℃ 이상으로 올라가면 스프린트 능력이 감소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때 판단력이 저하되며, 열사병 위험도 높아진다. 특히 축구처럼 순간적인 의사결정이 승패를 가르는 종목에서는 이러한 인지 기능 저하가 치명적일 수 있다.
이미 전례도 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연구 결과를 보면 더운 경기일수록 선수들의 고강도 질주 횟수는 감소한 반면, 짧은 패스는 늘었다. 선수들이 무의식적으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경기 템포를 조절했다는 의미다. 이는 바꿔 말하면 폭염으로 전술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FIFA는 이번 월드컵에서 모든 경기에서 ‘냉각 브레이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으며, 선수들은 경기 도중 얼음 수건과 냉수를 이용해 체온을 낮출 수 있다.
선수들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고난은 바로 ‘고지대’다. 월드컵 개최 도시 가운데 가장 독특한 환경을 가진 곳은 해발 약 2240m에 위치한 멕시코시티다. 조별리그 일부 경기와 토너먼트 경기가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며, 스포츠 의학자들은 폭염보다 더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로 고도를 꼽고 있다.
고지대에서는 산소가 부족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같은 거리를 뛰어도 평지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며, 산소 부족으로 숨이 차기 시작하면 판단이 느려지고 움직임이 둔해진다. 특히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이러한 변화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고지대와 저지대를 반복적으로 이동하는 급격한 환경 변화 역시 문제다. 선수들은 멕시코시티에서 경기를 치른 뒤 며칠 만에 해수면에 가까운 도시로 이동할 수 있다. 스포츠 의학 전문지 ‘에스페타’는 “환경 스트레스는 각각 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중첩된다”고 설명한다. 즉 고지대에서 받은 피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폭염과 이동 스트레스를 겪으면 선수들의 몸에는 예상보다 훨씬 큰 부담이 가해질 수 있다.
결국 이번 월드컵은 기존의 월드컵과는 다른 방식으로 승부가 갈릴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전술과 기술, 개인 기량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면 이번에는 회복과 수면, 체온 조절, 이동 계획 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과연 전 세계 축구 팬들은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춘 아름다운 축구를 보게 될까, 아니면 혹독한 환경 속에서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는 ‘서바이벌 게임’을 보게 될까. 이제 지구촌 축구팬들의 눈과 귀는 북중미 대륙으로 향하고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