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컴퓨터 주문 접수 오류로 1시간 만에 15조 6000억 원이라는 사상 초유의 매수주문이 나와 시장이 술렁였다. |
지난 7일 오후 2시께 홍콩의 한 운용사 트레이딩 데스크가 초고속 전용선(DMA)을 통해 KB투자증권 창구로 코스피200 선물에 대한 매수주문을 냈다. 시장 상황을 봐가며 소량 주문을 내라고 알고리즘(컴퓨터가 어떤 일을 수행하기 위한 단계적 방법) 방식으로 컴퓨터에 입력한 것이다. 정상적으로는 한 번 주문을 내면 접수 신호가 들어온 후 더 이상 주문이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컴퓨터가 주문 접수 신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그 결과 같은 주문을 무한대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주문당 0.03초, 1시간 만에 15조 6000억 원(12만 계약)이란 사상 초유의 매수주문이 나왔다. ‘미친’ 컴퓨터를 막을 수 없었던 트레이더는 결국 전용선을 끊어서야 주문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그나마 이번 사건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대규모 매수주문이 주가지수를 끌어올릴 수도 있었지만 이날 삼성전자 주가가 부진하며 이를 상쇄시켰다. 당장의 부담 요인은 증거금이다. 이날 주문 실수로 체결된 규모는 약 3만 5000계약으로 4조 원에 육박한다. 규정에 따라 거래 다음날 정오에 거래대금의 9%를 증거금으로 내야 하는데 KB증권이 대신 3000억 원가량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3000억 원이 손실은 아니다. 현재 떠안은 물량을 시장에 내다팔면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홍콩 운용사의 최종 손실은 현재 떠안은 물량을 얼마에 되파느냐에 달려있다. 주식시장이 하락해서 선물가격이 떨어지면 손실이 커질 수 있지만 주식시장이 상승하면 되레 이익을 볼 수도 있다.
이번 사건은 ‘컴퓨터의 실수’가 원인이다. 주문 전용선으로 불리는 DMA(Direct Market Access)는 트레이딩 데스크와 거래소를 직접 연결해주는 고속 매매 시스템이다. 0.01초 만에 수익률이 뒤바뀔 수 있는 환경에서 매매 체결속도를 높이기 위해 등장한 방식이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고빈도매매(High Frequency Trading)로도 불린다.
전용선을 이용한 초고속 DMA 주문은 각국 거래소가 글로벌 시장에서 영리단체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등장했다. 거래 단위로 돈을 받는 거래소로서는 잦은 주문을 내주는 DMA 채택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국내에서도 2010년 기준 코스피200 선물 옵션 매매의 97.5%인 9011조 원이 DMA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컴퓨터에 주문을 맡긴 만큼 컴퓨터가 실수를 하면 그 후폭풍은 엄청나다. 지난 2010년 5월 미국에서도 다우지수가 장 마감 직전 1000포인트 가까이 폭락한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 사건이 터졌는데, 역시 DMA 때문인 것으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조사결과 드러났다. 미국은 이후 비정상적인 고빈도매매로 인한 시장충격을 막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날 골든브릿지증권은 총 268억여 원의 손실을 입었다. 주문 실수를 낸 직원은 옵션 만기일을 맞아 옵션을 매매하려다 착오로 선물계좌 주문을 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골든브릿지증권은 2010회계연도에 영업손실 110억 원, 당기순손실 63억 원을 기록하며 적자전환했다. 주문 실수를 낸 직원은 면직 처리됐고, 대표이사 역시 사태에 책임을 지고 지난 5월 27일 정기주주총회를 통해 사임했다.
이러한 실수로 이득을 보는 쪽도 있다. 2010년 2월 미래에셋증권은 캐나다왕립은행(RBC)의 미국달러 선물스프레드 위탁주문을 받았다. 주문가격 0.90원과 0.80원에 각각 1만 5000계약(1계약은 1만 달러), 0.70원에 1만 계약을 사달라는 주문이었다. 선물스프레드 거래는 만기일이 서로 다른 선물을 동시에 사고팔아 두 선물의 가격차이를 겨냥한 매매다. 그런데 미래에셋증권 직원은 RBC의 주문을 입력하는 과정에서 당초 주문받은 0.80원 대신 100배 높은 80원에 1만 5000계약을 사도록 잘못 입력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이 주문이 해당 직원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시장 참여자에겐 시장가보다 100배 가까이 높은 주문에 선물계약을 팔 수 있는 ‘기회’였다. 때문에 주문은 불과 15초 만에 전량 체결됐다. 동양증권이 74억여 원, 하나은행과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은 각각 12억여 원과 29억여 원의 차익을 얻었다. 반면 미래에셋증권은 주문 실수로 15초 만에 120억여 원의 손해를 입었다. 뒤늦게 주문 실수를 알게 된 미래에셋증권은 한국거래소에 착오거래정정 신청을 냈고, 하나은행과 미래에셋맵스운용은 차익을 돌려줬다. 차익반환을 거부한 동양증권도 결국 재판까지 가서 차익을 돌려줬다.
재판부는 2005년 일본의 경우를 참조했다. 2005년 12월 일본 미즈호증권의 한 직원은 장외시장에 신규 상장된 제이콤의 주식 ‘1주를 61만 엔에 팔아달라’는 고객의 주문을 ‘1엔에 61만 주를 판다’고 잘못 입력했다. 헐값에 주식이 시장에 나오자 매수자들이 몰렸다. 이때도 노무라, UBS, 닛코코디얼, 리먼브라더스 등 160억 엔의 차익을 본 6곳의 금융기관은 이익금 대부분을 돌려줬다. 개인투자자들은 미즈호증권으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주문 실수가 모두 해프닝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현물주식시장과 선물시장, 그리고 옵션시장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까닭에서다. 선물에서 이상주문으로 시장가격이 왜곡되면 현물주식시장과 옵션시장 가격에도 즉각 영향을 미치게 된다. KB증권의 경우처럼 대규모 선물매수주문이 나와 선물가격이 오르게 되면 현물가격도 덩달아 오르게 된다. 현물가격이 오르면 주가가 떨어지는 데 베팅했던 풋옵션 매수 투자자나 콜옵션 매도 투자자들이 뜻하지 않는 손실을 보게 된다. 주문 실수로 인한 거래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므로 손실을 보상받기도 어렵다. 물론 이 경우 풋옵션 매도 투자자나, 콜옵션 매수 투자자는 의외의 수익을 얻을 수도 있다.
한편 금융위원회는 2011년 말 파생상품시장에서 주문 실수로 거래가 이뤄졌을 경우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제도 개선방안을 마련했다. 실수로 체결된 거래의 손실액이 10억 원 이상이면 파생상품시장 종료 전까지 상대방과 합의해 거래소에 구제를 신청할 수 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