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30일 오전 7시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 유족 손주택 씨(68)가 입간판에 붙어 있는 종이를 교체했다. 305라는 숫자가 306으로 바뀌었다. 유족들이 공항을 지킨 지 306일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참사로 떠나보낸 가족과 이별한 시간이기도 하다. 입간판에는 ‘306일째, 너무나 가슴이 아파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손 씨는 참사 때 아들을 잃었다. 그는 “너이(네 명)에서 서이(세 명)가 됐지”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참사 이후 손 씨는 줄곧 공항에 있었다. 49제가 있었던 2월 15일 이후 일주일에 5~6일은 공항에서 아내와 함께 머물렀다. 일주일에 한 번은 목포에 마련된 추모관을 찾았다. 은퇴 후 소일거리로 하던 조선소 인력 양성 강의는 그만뒀다. 아내와 함께 취미로 즐기던 파크 골프도 더 이상 칠 수 없었다.

식사 뒤에는 공항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간식을 나눠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은 APEC 정상회담이 화두였다. 참사 관련 기사나 대표단 활동도 주요 관심사였다. 유족들이 모인 네이버 카페에 대표단의 활동을 알리는 글이 올라오면 댓글을 달아주며 응원을 보냈다. 그러다 불현듯 울먹이거나 눈시울을 붉혔다. 떠나보낸 가족 생각이 나서다. 이런 대화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됐다.
이들은 집회 준비 등 대표단 활동을 돕거나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딸을 떠나보낸 심선임 씨(59)는 뜨개질을 했다. 가방을 만들어 딸 친구들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옆에 있는 ‘언니’들의 이런저런 훈수가 쏟아졌다. 신 씨는 잠시 슬픈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잠이 들 때까지 뜨개질을 한다고 했다. 신 씨는 10월 30일 아침 1층 분향소에서 울었다. 아닌 줄 알면서도 혹시나 딸이 돌아올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금요일에 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광주 직장으로 출근했다.
오후 10시경 소등이 시작되면 하루가 끝난다. 유족들은 구호 대피소로 돌아간다. 공항 2층 1번 게이트 앞에는 대한적십자사가 제공한 40여 동의 대피소가 설치돼 있다. 외부에는 ‘179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한 점 의혹 없는 진상규명’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재발방지’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참사를 다룬 신문 기사도 붙어 있었다.
0.6평 남짓한 대피소에 누우면 대한적십자사, 삼성, 신한은행 등 지원 물품을 보낸 회사 이름이 적힌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뚫린 천장으로 미등 빛이 들어온다. 가림막을 치거나 안대를 낄 수밖에 없다. 발걸음 소리 같은 소음도 여과 없이 들어온다. 바닥은 딱딱하다. 깔개를 깔고 그 위에 침구류를 덮어도 어쩔 수 없이 불편하다.
쌀쌀해진 날씨에 한기마저 올라온다. 난방으로 전환하기까지 시간이 걸려 핫팩으로 버텨야 한다. 더운 여름 때는 무선 선풍기에 의지했다. 밤 10시 이후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기 때문이다. 9월 폭우 기간에는 빗물이 셌다. 인근 논밭에 뿌려진 퇴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 때문에 잠을 청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참사 트라우마가 문제였다. 유족들은 수면제를 복용해도 길어야 2시간 잘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건강이 악화된 이들도 많다. 손주택 씨는 지병 때문에 6월 17일 입원해서 7월 25일 퇴원했고, 곧바로 공항으로 왔다고 했다. 공항이 유족들을 버티게 하는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손 씨는 “쳐다보기도 싫은 공간이기도 하지만, 아들이 (1층) 분향소에 가 있어 여기를 지켜야 된다는 생각이 있다”며 “그나마 이렇게 지키고 있으니까 우리가 투쟁도 할 수 있고 진상규명도 요구할 수 있다. 여기가 없으면 구심점이 없어져버린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유
김성철 유가족협의회 상임이사는 딸과 아내를 잃었다. 위로하는 말을 듣기 싫어 회사 식당을 가지 않게 됐다고 했다. ‘자식 잃고 술먹는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사람들을 피했다. 자신의 비극이 분위기를 깰 까봐 친구들과 만나지 않게 됐다. 아내와 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면 집은 비어 있었다. 트라우마 센터에서는 자살 위험이 높다고 했다. 그래도 공항에서는 서로 울면서 치유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지난 5월 157명의 희생자 유족을 대표하는 정식 유가족협의회가 출범했다. 김유진 대표를 비롯해 총 10명으로 구성됐다. 김 상임이사는 협의회에 합류했다. 치유가 목적이었다고 했다. 일할 사람이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김 상임이사는 “대학 다니는 아이들한테 학교 그만두고 여기 와서 일하라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아이들이 떠난 집은 어르신들만 계신다. 힘든 가족이 너무 많다”고 했다.
대표단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4월 통과된 ‘12·29 여객기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에 진상규명 조항이 빠졌기 때문이다. 정치권, 정식 대표단 이전 활동하던 임시 유족 대표단, 유족 사이에 소통 오류가 있어 이 문구가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통과된 특별법을 개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특별법 통과 이후 정치권과 시민들의 관심은 식었다. 특별법 통과로 진상규명 작업이 순조롭게 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인식도 팽배하다.
진상규명을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산하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사조위)는 유족들의 신뢰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7월 19일 국토부의 엔진 정밀조사 결과 발표 시도는 유족들의 불신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당시 사조위는 엔진 결함은 없었고, 조종사가 실수로 반대쪽 엔진을 껐다는 내용의 언론 브리핑을 진행하려다 유족 반발로 취소했다.
사조위는 오른쪽 엔진전력장치(IDG)가 분리돼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IDG는 조종사가 수동으로 불리하거나 윤활유 온도가 뜨거워지면 분리된다. 그러나 IDG 스위치는 덮개로 씌워져 있다. 덮개를 열면 얇은 구리선으로 감겨 있다. 이런 장치를 모두 풀어야 스위치를 조작할 수 있다.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조작할 이유가 없는 장치라고 한다. 사조위는 관련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유족들은 사조위에 정보 공유를 요청했다. ‘조종사 과실’이라는 조사 증거를 제시하라는 것이다. 객관적 증거인 CVR(조종실음성기록장치), FDR(비행자료기록장치), CSD(정속 구동 장치), IDG, 관제탑과의 교신 음성 기록 등을 요구했다. 사조위는 모두 제공하지 않았다. 조사의 독립성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10월 29일 김유진 대표는 종합감사 참고인으로 출석해 “유족들은 300일 동안 단 한 장의 자료도, 한 줄의 진실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사조위를 국토부에서 독립시켜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조위가 감독기관 눈치에 제대로 조사하고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조위 독립을 보장한다는 법 조항이 있지만, 상임위원은 국토부 항공정책실장과 철도국장이 맡는다. 사조위를 독립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항공철도 사고조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은 계류 중이다. 교통법안심사소위 회의록에 따르면 손명수 의원 등은 ‘사조위 전문성 악화’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법안은 계류 중이다.
유족들은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다. 무안공항에서 만난 유족들은 대화 도중 IDG 같은 전문 용어를 사용했다. 사조위 조사의 석연치 않은 점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사조위 대신 여러 전문가들과 유족 대표단 주도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12월 말 사조위가 발표할 중간보고서에 대해서도 신뢰하기 어렵다고 했다.
11월 1일 유족들은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집회를 연다. 대표단은 “10개월간 유가족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책임자 ‘0명’ 정보공개 ‘0’건에 처절하게 짓밟혔다“다고 했다. 이들은 ‘성역 없는 진상규명, 책임자를 처벌하라’ ‘유가족이 당사자다 모든 정보를 공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진상규명 작업이 장기화되면서 유족들의 무안공항 체류도 길어질 전망이다. 김성철 상임이사는 “우리가 여기 공항에서 이러고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며 “우리끼리는 ‘서로 안 만났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한다. 안 만날 사람들끼리 만나가지고 여기 있다고”고 말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