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년의 악기’라고도 불리는 대금은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악기다. 고구려 오회분4호묘 벽화에는 삼족오 옆에 젓대(대금의 우리말)를 불고 있는 선인의 모습이 묘사돼 있는데, 이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대금이 널리 연주돼 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초·중기에는 궁중 의례에 향악(우리 고유 음악)이 쓰이면서 대금이 길례(경사스러운 예식)와 가례(왕의 성혼이나 세자 책봉 등의 예식) 때 악대 연주에 사용됐다. 김홍도의 ‘무동’, 신윤복의 ‘주유청강’ 등의 풍속화에서 대금 연주 모습을 볼 수 있어 민간에서도 대금이 애용됐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적당한 대나무를 채취해 그늘에서 말린 후 화로 위에서 굽고 구부러진 대를 곧게 펴는 과정을 거친다. 대나무의 진이 빠지고 곧은 모양이 갖춰지면 내경을 파낸다. 내경의 지름은 대금 소리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에 쓰임에 맞게 크기를 조절한다. 그 다음에는 입김을 불어넣는 입구인 취구를 만든다. 구멍의 각도를 조금만 다르게 해도 음역의 폭이 달라지기 때문에 숙련된 기술과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다. 이어서 취구 아래쪽에 음을 연주할 여섯 개의 지공을 판다. 취구와 지공 사이에는 울림의 정도를 조절하는 청공을 파고 맨 끝에 미세한 음정을 조절하는 칠성공을 만든다. 그 뒤에는 온도 변화에 민감한 대나무가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튼튼한 줄로 대금을 여러 번 동여맨다.
대금의 형태가 갖춰진 후에는 제대로 제작되었는지 점검하는 조율 과정을 거친다. 끝으로 청공에 ‘청’을 붙여 대금을 완성한다. 청은 음력 단오를 전후해 채취한 갈대의 속껍질로, 이것을 통해 음이 울려 나오면서 대금 특유의 신비한 음색이 만들어진다. 자유로운 음처리와 미분음까지 표현할 수 있는 대금의 표현력은 웅장하면서도 청아하고 흥겨우면서도 애절한 느낌을 전달한다.
산조 연주에 사용하는 대금(산조대금)은 정악 연주에 사용되는 대금(정악대금)과 차이가 있다. 산조대금은 다양한 민속 가락을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음의 변화가 없어 합주에 주로 사용되는 정악대금과는 크기, 잡는 방법, 음높이가 다르다. 산조대금은 정악대금보다 길이가 짧고, 지름도 작기 때문에 음높이가 높고 연주하기에 편하다. 또한 지공 간의 간격이 좁아서 빠르게 연주하며 다양한 표현을 해낼 수 있다. 반면 산조대금의 취구는 정악대금의 취구보다 큰데, 이는 취구를 이용해 음정의 차이 등을 표현하는 것을 산조 음악에서 중시하기 때문이다.

대금산조는 20세기 초 당대 최고의 대금 연주가였던 박종기 선생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20~1930년대에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는데, 당시 라디오를 통해서 흘러나온 대금산조의 대부분은 그가 연주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한주환 선생은 오늘날 연주되는 대금산조의 틀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다.
1971년 대금산조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대금 시나위의 최고 연주가로 자신만의 대금산조를 완성한 강백천 선생이 초대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1993년에는 이른바 ‘강백천류’의 대금산조를 전승한 김동표 선생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돼 맥을 이었다. 현재는 한주환 선생에게서 사사한 이생강 선생이 대금산조 예능보유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자료 협조=국가유산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