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원서와 별개로 권 씨도 재판부를 향해 A4 용지 12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썼다. 권 씨는 편지에서 “테라 프로젝트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어진 편지 내용은 구체적인 책임 소재 회피였다.
권 씨는 자신을 ‘컴퓨터만 아는 괴짜(Nerd)’라고 칭했다. 권 씨는 자신이 테라 프로젝트를 이끌 자격이 부족했고, 프로젝트 초기 성공에 도취해 오만해졌다고 자평했다. 그러면서도 권 씨는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 테라 프로젝트를 믿었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했을 뿐 투자자를 속일 의도는 없었다는 주장으로 풀이된다.
권 씨는 테라 프로젝트 규모가 커지면서 자신이 모든 사안을 파악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권 씨는 “프로젝트 세부 사항을 막연하게라도 알면 다행일 정도였다”며 “하지만 테라 커뮤니티에서는 어떤 답이든 저에게 구했다. 저는 알든 모르든 답변을 계속 제공해야 했다. 답변을 급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권 씨는 “테라 프로젝트 안정성을 경고하는 등 비판이 있었지만,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옳다고 보는 지지자들이 많았다”고 강조했다.
권 씨는 테라·루나 코인 폭락 사태 이후 직원들 급여를 주기 위해 싱가포르에서 세르비아로 향했다며 도피 목적이 아니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권 씨는 투자자들을 위해 테라 프로젝트를 다시 구축하려고 했지만 싱가포르 은행 계좌가 동결돼 직원들 월급도 줄 수 없었다고 했다. 권 씨는 세르비아 은행과 관계를 맺으라는 변호사 조언을 따른 걸 후회한다고 편지에 적었다.
권 씨는 어린 시절부터 성공에 대한 강박에 시달렸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권 씨는 “저는 꽤 독특한 환경에서 자랐다. 제 어머니는 제가 성공할 운명이라고 믿었다. 성공에 방해되는 요소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제거했다”며 “또래들이 대중가요를 들을 때 저는 고전 오디북을 들었다. 지금까지도 저는 연예인들에 대해 무지하다”고 말했다.
또 권 씨는 “어머니는 무엇을 위해 성공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고 그저 성공을 원했다”며 “저는 스탠퍼드와 옥스퍼드 등 유명 대학에 합격했지만 어떤 대학인지 거의 몰랐다. 제가 하버드 대학에 불합격했을 때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고 덧붙였다.

권 씨 가족 중에선 아내와 장인이 탄원서를 썼다. 권 씨 아내 이 아무개 씨는 탄원서에서 “권 씨 신용카드 한도는 4000달러였다. 권 씨는 테라 로고가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출퇴근했다”며 “권 씨는 진심으로 믿었던 비전에 시간, 재능 등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권 씨 장인 이 아무개 씨는 “권 씨가 유죄를 인정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권 씨가 법정에서 무죄를 밝히고 가족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며 “권 씨는 딸 이름을 루나, 반려견 이름을 테라라고 지었다. 자신의 사업이 사기라거나 위법하다고 생각했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 씨와 사기를 공모한 혐의로 국내에서 재판 받고 있는 피고인 중 3명도 권 씨를 위해 탄원서를 냈다. 이들 3명은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들이 법률대리를 맡고 있다. 권 씨 국내 사건 역시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이 맡고 있다.
권 씨와 함께 해외 도피하다가 몬테네그로에서 붙잡힌 테라 프로젝트 최고재무책임자 한창준 씨는 “권 씨는 열정과 헌신을 보여준 리더였다”며 “테라 프로젝트는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지만 권 씨의 끊임없는 아이디어와 헌신 덕분에 수년을 견뎠다”고 말했다.
테라 프로젝트 운영 지원을 맡았던 A 씨는 “테라 프로젝트는 붕괴 규모만을 근거로 너무 많은 비난을 받았다”며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사기였다고 규정하는 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테라 프로젝트 개발자였던 B 씨는 “권 씨는 테라 코인이 널리 채택돼 사용될 것이라는 환상을 투자자에게 제시한 적이 없다”며 “권 씨가 사람들을 속이려는 어떤 징후도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권 씨와 대학, 직장, 감옥 등에서 인연을 맺은 지인들도 탄원서를 썼다. 권 씨와 스탠퍼드 대학을 함께 다녔던 미국인 C 씨는 “미국 대통령은 명백한 폰지 사기인 밈 코인을 출시할 수 있다. 반면 권 씨는 수년에 걸쳐 정교한 플랫폼을 구축하려고 노력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다.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권 씨가 테라 프로젝트 설립 전 운영했던 스타트업 ‘애니파이’ 직원이었던 D 씨는 탄원서에서 “애니파이 재정이 악화해 직원들 급여가 밀렸을 때 권 씨가 개인 자산 일부를 팔아 급여를 지급한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또 D 씨는 “테라 프로젝트가 창출한 부에도 불구하고 권 씨가 사치에 빠진 것을 본 적이 없다. 권 씨는 500만 달러를 번 이후 돈이 그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자주 말했다”고 덧붙였다.
권 씨와 함께 미국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도 탄원서를 썼다. 그는 “지난 1년간 권 씨에게 프로그래밍을 배웠다. 교도소 직업 훈련 프로그램보다 유용했다.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처음 느꼈다”며 “15세 때부터 감옥을 드나들며 범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없어 다시 마약을 다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권 씨는 미국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미국에서 형기를 마친 뒤 한국에서 다시 수사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한국 검찰은 신현성 씨 등 테라 프로젝트 관계자 8명을 권 씨 공범으로 지목하고 사기와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로 2023년 4월 기소했다. 권도형 씨와 함께 해외 도피하다가 먼저 국내 송환된 한창준 씨도 2024년 4월부터 함께 재판받고 있다. 이들 9명에 대한 1심 재판은 더디게 진행 중이다. 아직 증인신문 단계다.
남경식 기자 ngs@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