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선라인’ 논란과 실적 부진, 노사갈등 등으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현대그룹에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을 둘러싸고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과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그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세 형제 그룹의 ‘수상한 삼각관계’를 추적했다.
최근 현대차그룹 계열 현대글로비스와 현대중공업 계열 현대오일뱅크가 1조 1110억 원대의 장기 운송계약을 체결했다. 2014년 7월부터 10년간이다. 이를 위해 현대중공업 계열 하이투자증권은 선박펀드를 조성, 현대삼호중공업에 초대형 유조선 4척을 발주했다. 이로써 현대글로비스는 새로운 시장 개척은 물론 ‘일감 몰아주기’ 부담을 일부 털어냈다. 현대중공업은 조선 업황 침체 속에서 수주를 따냈다. 범 현대가 형님인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과 동생인 현대중공업 대주주 정몽준 의원이 손을 맞잡은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철저하게 소외된 또 하나의 형제그룹이 있다. 바로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주력 현대상선이다. 현대오일뱅크의 원유 운송은 1996년부터 지난 20년 가까이 현대상선이 맡아왔다. 이번 계약에서 현대오일뱅크는 현대상선에 입찰제안서조차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원유 운송 경험이 전혀 없는 현대글로비스에 수의계약이나 다름없이 계약한 것은 변종 일감 몰아주기”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 측은 “비즈니스적 관점으로 봐 달라”고 주문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현대글로비스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좋은 조건을 제시했을 것”이라며 “특수한 관계 때문에 현대오일뱅크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다면 그게 비극”이라고 밝혔다.
계약을 뺏긴(?) 현대상선으로선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가뜩이나 세계 경기 침체로 현대상선은 실적부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3분기까지 5772억 원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미 지난 2011년 한 해 적자인 5343억 원을 넘어서는 수치다.
계열사인 현대상선에 실적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룹으로서는 현대차·현대중공업그룹의 관계가 공고해지면 경영권 위협 요인으로 다가온다. 현대그룹은 지난 2006년 현대중공업과 직접적으로 경영권 분쟁을 치렀고 현대차그룹과는 2010년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격하게 대립한 바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그룹 경영권의 핵심인 현대상선 지분을 23.7%(2012년 11월 22일 기준) 쥐고 있고 현대차그룹도 현대건설을 통해 7.7% 가지고 있다.
이 두 그룹이 연합작전을 편다면 지난 2006년 현대중공업과의 경영권 분쟁 때보다 더 위력적이다. 현대오일뱅크와 현대글로비스의 이번 계약을 보는 현대그룹의 시선이 불안한 이유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를 ‘범 현대가의 현대그룹 고사작전’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비선라인으로 인한 경영 난맥상에 실적부진까지 겹치면 경영권 공격 명분이 범 현대가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난해 11월 전국민주금융노동조합 현대증권지부(노조·위원장 민경윤)의 폭로로 비선라인이 드러나자 재계에선 “범 현대가의 움직임을 주시해야 한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왔고 이는 아직 유효하다. 전직 현대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전 경영권 분쟁이 있었을 때 우리가 돈은 없었지만 정몽헌 회장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는 등 명분과 여론 덕에 그룹을 지킬 수 있었다”며 “이번에 비선라인 때문에 범 현대가에 명분을 주면 큰일”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현대차·현대중공업그룹은 늘 “현대그룹엔 관심 없다”고 밝혀왔다.
그런데 최근 범 현대가 주변에서 “현대차·현대중공업그룹이 내부에 현대그룹 인수를 위한 조직을 꾸려 활동에 들어갔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연초 구체적인 인수 자금마련 지시까지 있었다는 전언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그룹, 비선라인 관련 정보를 면밀하게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두 그룹은 공식적으로 “절대 사실 무근”이라며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M&A(인수·합병)는 전격적인 경우가 많다. 지난 현대건설 인수전 때 현대차그룹은 애초 관심 없다고 하다가 전격적으로 참여, 논란 끝에 성공했다. 당시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에 대한 그룹 내부의 방침이 정해진 것도 없다…. 지난 10년간 이런 말을 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현대차그룹을 공격했다. 무산됐지만 지난해 11월 현대중공업의 한국우주항공(KAI) 인수전 참여도 전격적이었다. 조건이 성립되면 언제든 치고 들어올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분석이 지나친 억측일 수 있다. 현대차·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연말 현대상선 유상증자에도 불참해 지분율이 낮아지게 됐다. 그럼에도 두 그룹이 계속 현대상선 지분을 대량 보유하고 현대그룹의 경영이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위협’은 계속될 듯하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
“유증 참여 책임회피 하시나”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