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해석을 한다고 해서 이 캐릭터를 내 식으로 만들겠다며 구체적으로 원작과 구분 지으려 하진 않았어요. 대신 원작에서의 세련된 서양 남자 특유의 아우라를 흉내 내려 하지도 않았고요. 기호를 연기할 땐 그냥 한국 아저씨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처음엔 대한민국 '꼰대' 아저씨가 회사에 다시 들어갔다가 서서히 변하는 모습도 생각해 봤는데 그러려면 두 시간 가지고는 서사를 다 보여줄 수 없겠더라고요(웃음). 마지막에 기호가 선우를 대하는 모습도 보면 마치 내 딸을 대하듯이 하잖아요? 마침 기호에게도 딸이 있는 설정이니까 원작에 없는 그런 (한국의) 정서를 한 번 넣어보자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9월 16일 개봉하는 '인턴'은 창업 3년 만에 100억 원대 매출을 올리며 브랜드 'WOO22'(우투투)를 패션업계의 다크호스로 키워낸 젊은 CEO 선우(한소희 분) 앞에 경력 37년의 실버 인턴 기호(최민식 분)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오피스 코미디다. 출판사에서 은퇴한 뒤 다시 회사 생활에 뛰어든 기호는 디지털 업무 환경도, 자유분방한 젊은 직원들의 문화도 낯설지만 자신의 경험을 앞세워 가르치려 들기보다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과 여유로 사람들 사이에 스며든다. 강렬하고 묵직한 캐릭터로 익숙했던 최민식에게는 오랜만에 능청스러우면서도 따뜻한 얼굴을 마음껏 꺼내 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원래 제가 귀여운 사람입니다(웃음). 저는 매번 연기할 때 제 안에 있는 여러 모습 중에서 곶감 빼먹듯이 하나를 극대화시키는 식이었어요.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을 연기할 땐 굉장히 예민하고 날 서 있었는데 이번에 '인턴'을 촬영하면서는 마음이 즐거워서 그런지 괜히 집에서 배시시 웃게 되더라고요. 우리 집사람이 '왜 그래, 하던 대로 해'라고 할 정도로(웃음). 이렇게 귀여운 모습을 보여드렸으니까 다음엔 또 악마 같은 걸 해 보고 싶네요. 장경철은 진짜 그냥 양아치 수준으로 보일 정도로 '우와, 진짜 악마다!'할 만한 연기를 보여드릴게요(웃음)."

졸지에 '밈(Meme·온라인에서 유행처럼 퍼지는 이미지나 문구) 부자'가 된 최민식 역시 이런 반응을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배우로서는 새 작품의 캐릭터가 먼저 보이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오래전 작품까지 끊임없이 소환되는 것 역시 자신을 향한 관심의 한 방식이라고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사실 배우 입장에선 전작 이미지가 겹친다는 게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에요. 새로운 캐릭터나 새로운 정서의 작품이 부각돼야 하는데 아직도 그때 밈이 돌고 있으면…. 그렇지만 그게 제 팔잔데 어떡하겠어요? 워낙 전작에 자극적인 캐릭터들이 많으니까 지금까지 이렇게 밈으로 때려맞고 사는 거지(웃음). 이것도 관심의 표현 중 하나니까 '인턴'이란 작품과 연계돼서 관심을 받는다면 그것 역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이제부터는 좀 (연기를) 대충대충 할까 싶기도 해요, 사람들이 기억 못하게(웃음)."
31살 차이의 한소희와 처음 만들어낸 호흡도 '인턴'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극 중에서도 세대와 위치가 전혀 다른 기호와 선우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서사를 보여주는 만큼 실제 두 배우가 만들어낼 앙상블에도 관심이 모였다. 특히 한소희가 '인턴' 출연 의사를 강하게 피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최민식은 촬영 전부터 이 당찬 후배 배우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고도 강조했다.
"그 친구도 이번 작품에 목숨을 걸었죠(웃음). 영화에서 그 각오가 잘 보이지 않나요? 제가 후배 한소희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선우라는 캐릭터와 공통분모가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배우로서의 삶을 사는 데 있어서 굉장히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것이고 괴로움도 있었을 텐데, 그런 살짝 불안정한 마음들이 선우랑 아주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지더라고요. 기호 입장에서 봤을 때도 뭔가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줬어요. 배우로서 장점도 많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심도 많은데 그걸 진짜 표현해 내는 의지까지 갖춘, 참 대견한 후배죠."

"후배들하고 작업하려면 스스로가 먼저 변해야 해요. 영화는 혼자 하는 예술이 아니라 각 파트별로 앙상블을 이뤄내는 것이거든요. 이 친구들 사이에 잘 스며들겠다는 마음가짐이 없으면 세대 차가 그대로 나버려요. 진짜 생각하는 것부터 다르니까요. 얘기해 보면 완전히 딴 세상 사람들이야(웃음)! 저는 그냥 물이 돼서 자연스럽게 스며들려고 했어요. 애들이 술자리에서 농담을 해도 '야, 그건 뭐야?'하고 물어보고 '재밌다, 참 희한한 놈이네 저놈'하면서 계급장 떼고 재미있게 놀았죠. 특히 '인턴'은 또 그래야만 하는 작품이기도 했고요."
젊은 후배들과 섞이기 위해 스스로 먼저 변해야 한다는 최민식의 말에는 나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는 나이가 드는 것을 배우로서의 쇠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시간 연기하고 살아오며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폭은 더 넓어졌고 그만큼 표현해 보고 싶은 인물과 이야기도 많아졌다고 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로서 자신이 더 단단해졌다고 느끼는 지금, 정작 그 연륜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역할과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게 그의 아쉬움이었다. 최근 인터뷰를 할 때마다 "여기저기 최민식을 쓰라고 말 좀 전해 달라"고 덧붙이는 말에 농담보다 진담의 향이 더 짙게 묻어나는 것도 그런 아쉬움 탓일 터다.
"저는 나이가 든다는 것 자체는 너무 좋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기회가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제야 조금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알 것 같은 나이가 돼서 써먹을 만해졌는데 제 나이 또래가 활약할 수 있는 풀이 넓지가 않아요. 너무 안타깝잖아요, 밖에 얘기 좀 해주세요. '최민식 이제 쓸 만한데 왜 안 쓰냐?'고(웃음). 내 몸뚱아리가 재료고 내 인생이 밑천이라 저는 이제 어떤 인물이나 이야기든 다 이해할 수 있는 폭과 깊이가 생겼거든요. 이렇게 쌓아 올린 제 지식을 총동원해서 작품에 쏟아붓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자신도 있고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