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왼쪽)와 서청원 전 대표 사이의 갈등이 정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이들의 갈등사는 25년 전인 조선일보 시절부터 시작됐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렇다면 양김 이후로 정치권에서 주목할 만한 당대의 정가 라이벌은 과연 누구누구일까. 양김에 필적하진 못하겠지만 최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와 서청원 전 대표의 갈등관계에 정가 인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대표 경선에서 승리한 최 대표와 패한 서 전 대표 간의 갈등구도가 점차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듯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한나라당 대표 경선은 역대 어느 당내 경선보다 치열했던 선거로 평가받는다. 후보들 간의 지지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박빙의 1~2위를 다퉜던 두 사람은 상호 비방과 폭로전을 거듭하며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한때 최 대표의 화해 손짓이 있긴 했지만 경선 이후 서 전 대표는 최 대표의 리더십을 비난하면서 비주류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최근엔 두 사람의 갈등이 부인들에 의해 재연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 모임에서 서 전 대표의 부인이 경선 과정에서 최 대표측이 서 전 대표측에 대해 ‘돈을 뿌리고 다닌다’는 식의 비방을 했다며 최 대표의 부인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 이에 최 대표 부인이 ‘그런 일 없다’고 응수하면서 고성이 오가게 됐다. 수도권 지역 국회의원·지구당위원장 부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라 금세 당내 인사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됐다.
부인들까지 충돌한 만큼 이젠 최 대표와 서 전 대표 간의 화해는 거의 물 건너 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는 두 사람간 갈등의 골이 지난 경선에서뿐만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깊었던 탓이라는 지적이다.
최병렬 서청원 두 사람 ‘갈등사’의 시작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바로 조선일보사였다. 최 대표는 지난 63년에, 서 전 대표는 지난 67년에 입사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함께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78년 최 대표가 사회부장으로 보직을 옮기면서부터다. 당시 서 전 대표는 시경 캡(사회부 경찰 담당 수석기자)을 맡고 있었다.
최 대표가 사회부장으로 오자마자 <조선일보>는 연속 낙종을 하게 된다. 인력이 부족해 경력이 일천한 기자를 배치한 곳에서 연달아 기사를 빼먹은 것이다. 이후 최 대표는 전 경찰기자들에게 철야근무를 명하고 시경 캡인 서 전 대표를 매일같이 다그치게 된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서 전 대표가 술을 잔뜩 먹고 들어와 최 대표와 ‘한판 붙은’ 것이 ‘최-서’갈등의 첫 단추였다. 시경 캡이 ‘하늘 같은’ 사회부장에게 대놓고 고성을 질러댄 것이다. 후배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함이었지만 엄격한 위계질서를 강조하던 당시 신문사 풍토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후 서 전 대표는 시경 캡을 마치고 법조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두 사람의 대결구도가 다시금 펼쳐진 곳은 바로 정치권이었다. 먼저 정계에 입문한 쪽은 서 전 대표였다. 서 전 대표는 지난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취재 이후 신문사를 그만두고 야당인 민한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 동작 지역구에서 당선돼 국회에 입성한다. 이 무렵 최 대표는 <조선일보> 편집국장 자리에 있었다.
4년여가 흐른 85년 최 대표는 여당인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금배지를 단다. 그러나 85년 총선에서 서 전 대표는 재선에 실패한다. 이후 민추협에 들어가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만나 정치적 사부로 모시게 되면서 전환기를 마련한다.
87년 대선 당시 최 대표와 서 전 대표는 각각 노태우와 김영삼이라는 대통령 후보를 통해 대리 전쟁을 치르게 된다. 결과는 노태우 전 대통령 당선으로 인한 최 대표의 승리. 노태우 대통령 당선 과정에 공을 인정받은 최 대표는 이후 노태우 정권에서 주요 장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YS의 패배로 빛은 바랬지만 서 전 대표 역시 능력을 인정 받아 YS 밑에서 재선을 하게 되고 통일민주당 대변인과 총재비서실장을 거치게 된다.
▲ 지난 6월26일 최병렬 대표 당선 직후 포옹하는 최 대표와 서 전 대표. | ||
이때 이들과 함께 민자당에 있었던 한 정치권 인사는 이렇게 회상한다. “가끔씩 국회 본회의나 의원 총회에서 두 사람이 마주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가벼운 목례만 주고받을 뿐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거의 못 봤다. <조선일보> 선후배 사이로 알았는데 친하기는커녕 서로 경계하는 것 같아 놀라웠다. 서 전 대표는 YS의 신임을 받던 사람이고 최 대표 역시 92년 대선과정에서 선대위 기획위원장직을 맡아 두 사람이 마주칠 기회는 더 많아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국회 복도에서 마주치는 것조차 불편해 하는 것 같았다.”
불안한 동거를 하던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다시 맞각을 세우게 된 것은 지난 97년 신한국당(95년 12월 당명이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바뀜) 대선후보 경선에서였다. 최 대표는 직접 후보로 뛰어들었으며 서 전 대표는 이수성 후보측 경선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으로 최 대표와 맞서게 됐다.
당시 이회창 후보가 독주하던 상황에서 약체 후보였던 이수성 후보는 ‘영남후보 필승론’을 내세웠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이회창 대세론이 득세하던 상황에서 최병렬 후보 역시 영남권에서의 바람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청원 의원이 선거전략을 이끌고 있던 이수성 후보 진영에서 ‘영남후보론’을 치고 나왔다. 최병렬 후보는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이수성 후보의 지역주의를 비난했지만 내심 속상했을 것이다. 최 대표 진영의 유일한 희망을 이수성 후보가 ‘갈라먹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같은 당 소속이었지만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지난해 최 대표는 이회창 전 총재의 독주에 비난을 퍼부으면서 당내 비주류 중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대선 후보 경선에 직접 뛰어들어 ‘이회창 필패론’을 부르짖으며 이 전 총재에 대적하게 된다.
반면 서 전 대표는 이 전 총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지난해 5월 한나라당 대표직에 오른다. 이후 6·13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면서 한나라당 대선 정국을 ‘이회창-서청원’ 체제로 이끌게 된다.
두 사람이 외형적으로나마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추게 되는 것은 지난해 12월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이후 불안감을 느낀 이 전 총재측이 기존 선대위 외부에 선거전략에 능한 중진들로 구성된 별도의 팀을 만들었다. 선거 경험이 많은 홍사덕 윤여준 의원이 주축이었으며 최 대표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이 주도하는 회의에 선대위원장이었던 서 전 대표 역시 함께 참여했다.
대선을 보름 정도 남긴 시점에서 이들 중진들 모임이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대책회의를 가진 적이 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실질적으로 회의를 이끄는 것은 홍사덕 윤여준 의원이었으며 서청원 당시 대표도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며 “하지만 최병렬 대표는 거의 한마디로 하지 않은 채 앉아만 있다가 나갔다. 싫은데 억지로 앉아있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최 대표가) 서 전 대표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더라”고 덧붙였다.
대선 패배 이후 두 사람은 당권을 놓고 다시 한 번 맞붙었다. 6월 전당대회 결과 승자는 최병렬 대표였다. 그 뒤 서 전 대표는 장외행보를 거듭하면서 ‘반 최틀러’(최병렬 대표 별명) 전선 중심에 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최병렬 서청원 두 사람의 대결 구도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까.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한 사람은 전두환 정권에서 전국구로 정치를 시작했고 다른 한 사람은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던 야당 멤버였다”며 “태생적으로 상극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맞각을 들이댈 것으로 봐야하지 않겠나”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