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이 실신했을 당시 함께 있던 정부 팅 페이가 서둘러 구급차를 불렀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사망유희>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2대 제임스 본드’였던 조지 라젠비가 홍콩에 도착한 건 1973년 7월 20일. 골든하베스트의 레이먼드 초우 사장과 이소룡이 공항에 맞이하러 나갈 예정이었으나 이소룡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는 걸 느꼈고, 정부인 베티 팅 페이의 아파트에 누워 있었다. 이소룡은 전날인 7월 19일에 그 아파트로 들어갔고, 동행했던 레이먼드 초우는 일이 있어 아파트를 떠났다. 그날 밤 아파트엔 이소룡과 팅 페이 단 둘이 있었다.
다음 날 오전부터 이소룡은 몸이 좋지 않았고 두통을 호소하는 이소룡에게 팅 페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진통제인 이쿠아제식(Equagesic)을 주었다. 이쿠아제식엔 아스피린 성분과 함께 근육을 이완시켜주는 메프로바메이트가 들어 있었다. 약을 먹은 이소룡은 오후 7시 30분쯤에 잠이 들었다. 이후 팅 페이는 저녁 식사를 위해 이소룡을 깨웠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급해진 팅 페이는 레이먼트 초우에게 오후 9시 정도에 전화를 걸었다. 초우 사장은 조지 라젠비와 함께 골든하베스트 스튜디오에 있었다. 전화를 받은 초우는 팅 페이의 아파트로 급하게 차를 몰았지만, 차가 막혀 40분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초우는 구급차를 불렀다. 응급요원은 이소룡을 잠에서 깨우기 위해 10분가량 응급처치를 했지만 허사였다. 퀸엘리자베스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의식이 없었다. 흉부압박, 흥분제 주입, 전기충격, 심폐소생술…. 이소룡을 살리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검시가 이뤄졌고, 닥터 리세트는 이쿠아제식에 들어 있는 성분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으며, 뇌부종이 사인이라고 밝혔다. 사망 당시 이소룡의 뇌는 1400그램에서 1575그램으로 10퍼센트 이상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좀 더 정확한 검시를 위해 런던대학교 법의학과의 로널드 테이 교수가 가세했고, 그도 악성 부종이 이쿠아제식의 성분과 반응하면서 이소룡의 생명을 앗아갔다는 소견을 냈다. 1973년 7월 20일이었다.
이소룡과 그의 정부로 드러난 여배우 팅 페이.
이소룡의 장례식은 두 번 치러졌다. 7월 25일 홍콩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장례식이 있었고 3만 명이 넘는 추모객이 거리를 메웠다. 그럼에도 팅 페이는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중화권이 낳은 최고의 스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고, 그가 소림사로 은둔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리고 시신은 태평양을 건너 그가 말년을 보내고 싶어 했던 도시인 시애틀로 옮겨졌다. 두 번째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그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인 ‘When I Die’가 연주되었다. 레이크 뷰 공동묘지였고, 제임스 코번, 스티브 맥퀸 등이 그의 관을 들었다. 코번은 “친구였으며 스승이었던 이소룡은 나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당신과 함께 있어 평안했습니다”라는 추모사를 남겼다. 묘비명에는 ‘브루스 리, 절권도의 창시자’(1940.11.27.~1973.7.20)이라고 새겨졌다.
워낙 위대한 영웅의 죽음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의 최후엔 석연찮은 점들이 꽤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끊임없는 의혹이 제기되자 홍콩 정부는 전면적인 조사를 시작했고 9월 3일에 검시관인 에그버트 텅의 심리가 있었다. 팅 페이도 법원에 소환되었고 그제야 그녀는 이소룡이 죽던 날 자신의 아파트에 있었다는 걸 시인했다. 여론은 조금씩 들끓었다. <이소룡 : 쿵푸의 제왕>이라는 책을 쓴 펠릭스 데니스 같은 사람은 이소룡이 팅 페이 때문에 죽었다고 단정 내렸다. 7월 20일 이소룡이 실신했을 때 서둘러 구급차를 불렀다면 이소룡은 죽지 않았을 거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팅 페이는 겁을 먹었고 그냥 자연스레 회복되기를 바라며 이쿠아제식을 건넸다. 이것은 치명적이었고 약물에 대한 알레르기로 이소룡은 급속히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팅 페이는 병원 대신 레이먼드 초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차가 막혀 그가 늦게 도착한 것도 사인 중 하나였다. 이후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소룡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는데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조금만 더 빨랐다면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수많은 루머들이 돌기 시작했다. 마리화나에 대한 부분은 중국인들의 정서상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범죄 조직과의 관련설도 있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수군거림이었다. 하지만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소룡에게 찾아온 요절의 비극이 그의 아들에게도 유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저주였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