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김동연 국무총리실장. 이명박 정부 출신임에도 전문성과 소신을 인정 받았다는 평가다. 연합뉴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의 공통점은 ‘전문성과 소신’이다. 눈에 띄든 눈에 띄지 않든 이명박 정부에서 녹(祿)을 먹었지만 관련 분야에서의 전문성과 소신으로 인해 ‘이명박 정부 사람’이라는 정치적 색깔을 벗고 다시금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에서 일했던 김동연 국무총리실장과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발탁은 당사자조차 놀란, 의외의 인사였다.
사실 김동연 실장은 기획재정부 2차관으로 재직하던 지난해 하반기, 가까운 기자들과 만나 공직을 마감한 뒤 벌어질 ‘제2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 그는 <걸리버 여행기> 최신 완역판을 기자들에게 선물하며 “걸리버 여행기라고 하면 소인국과 거인국만 생각하는데 이 책에는 ‘하늘을 나는 섬나라’와 ‘말의 나라’ 등도 담겼다”며 꼭 읽어볼 것을 권했다. 마치 공직을 곧 끝내고 걸리버처럼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듯 보였다.
김동연 실장의 바람과 달리 박근혜 정부는 그를 장관급인 국무총리실장에 발탁했다. 김동연 실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경제금융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 국정과제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줄곧 차관 발탁설이 돌았다. 지난 2010년 7월 정권 하반기를 책임질 3기 청와대 참모진 출범 당시 신설된 수석급 정책기획관 적임자로 꼽히기도 했다. 결국 수평 이동, 예산실장에 임명됐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에서 공직을 시작, 예산·재정정책 분야 전문가인 만큼 자리보다는 일을 택한 것이다.
그는 일에서만큼은 소신을 꺾는 일이 없었다. 예산실장 시절, 예산안 심의를 시작하면서 직원들에게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인용하며 나라 곳간을 지키기 위한 ‘예산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주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교육·복지의 경우 한 번 정해지면 반영구적으로 예산이 들어가 미래 세대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더욱 철저한 심의를 요구했다.
기획재정부 2차관 때는 정치권의 복지공약 소요 재원 산출 및 공개를 주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공무원의 선거중립의무 위반’이라며 공개 경고를 받기도 했다. 당시 “재벌가 손자까지 정부가 보육비를 대주는 것은 문제 있다”며 0∼2세 영유아 전면 무상보육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이 같은 전문성과 소신이 그를 또다시 공직으로 이끌었다.
김동연 실장은 지인들을 만나면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만들어 볼 것을 권한다. 버킷 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목록을 가리킨다. 예산실장 시절 한 시사 월간지에서 버킷 리스트에 대한 글을 기고해 줄 것을 부탁해 실제 쓰다 보니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김동연 실장은 기고에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킷 리스트 중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하는 꿈이었다.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고 털어놨다. 서른셋 젊은 나이에 아내와 자식 넷을 두고 돌아가신 선친을 만나 장남으로서 짊어졌던 짐과, 그리고 열심히 살았던 지난날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선친이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어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 살다 결국 성남 지역으로 강제이주하게 됐고 한동안 천막에서 살아야만 했다.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야간 대학(국제대)을 나와 행정고시(26회)에 붙어 ‘고졸 신화’로 종종 불린다.
김동연 실장은 과거 싸이월드에 “나는 감사할 줄 알고, 물러설 때를 아는 공직자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속마음을 들여다 볼 길은 없지만 이명박 정부의 차관을 끝으로 진정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고 그 일을 하는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동연 실장의 자유는 한동안 박근혜 정부에 저당(?)잡히게 됐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병역 때문에 장관이 된 것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파격 인사로 꼽힌다. 장관이 지명 소감을 묻는 언론의 전화에 “나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 윤상직 장관은 1980년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으며 장남도 전방에서 군복무 중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병역만 본다면 장관으로 발탁되기에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셈이다.
윤상직 장관을 경험한 관료들은 그를 ‘학구파’로 기억한다. 상공자원부 출신으로 평소 “공부하지 않는 공무원은 공무원 자격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지난 2008년 지경부 자원개발정책관을 맡고 있을 때 <국제 석유개발 계약의 이해>라는 전문 서적을 출간했고, 2009년 무역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한 뒤에는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외국인 직접투자법제 해설>을 펴냈다.
때문에 해외 자원 개발과 관련해선 전문가 못잖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파견 시절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과 델라웨어주 공인회계사 자격증도 땄다. ‘시험을 봐서 장관을 임명한다고 해도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윤상직 장관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도 코드가 맞았다. 2010년 청와대 지식경제비서관 재직 당시 이명박 정부가 집권 중반기 ‘친서민, 공생발전’을 국정운영 기조로 내세우자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정책을 주도적으로 기획, 추진했다. 이에 차관급인 외청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지경부 차관으로 발탁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번 장관 인사청문회에서도 김제남 진보정의당 의원이 “실패한 ‘MB노믹스’의 최고 관료로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인데 박근혜 정부의 실물경제 장관으로 적절한가”라고 따져 묻자 “이명박 정부에서 두 번의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건 평가받아야 한다”며 맞섰다. 그는 그러면서 “이명박 정부의 잘된 부분은 계속 발전시켜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동반성장과 중소기업, 중견기업 육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과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기획재정부 1차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신 위원장은 국내외 금융위기를 몸으로 직접 경험한 대표적인 금융전문가다. 지난 2003년 ‘카드사태’ 당시 그는 재정부 금융정책과장이었고 지난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3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 스와프 협상을 성사시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초창기 신제윤 위원장의 위치는 그리 탄탄하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 초기 경제 정책을 총괄했던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이른바 ‘찍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행시 8회인 강만수 장관이 행시 24회로 까마득한 후배인 신제윤 당시 국제업무관리관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강만수 장관의 이 같은 인식은 2008년 금융위기 때 한·미 통화스와프를 실무에서 성사시키면서 확 바뀐다. 강만수 장관이 대통령이 참석한 회의석상에서 공개적으로 신제윤 위원장을 칭찬했다는 후문이다.
신제윤 위원장은 2011년 주요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 개최 당시 재무차관회의 의장을 맡아 코뮈니케 작성을 주도했고 2012년에는 녹색기후기금(GCF) 유치를 위해 인천시와 함께 범정부 차원의 정부유치추진단을 주재하면서 유치활동을 주도했다. 이를 통해 실력과 추진력을 함께 검증받았다.
다만 신제윤 위원장이 부족한 것이 있다면 후배들한테는 잘하는 데 윗사람한테는 그리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기획재정부 공무원노동조합이 2006년부터 매년 실시하는 ‘닮고 싶은 상사’에 4년 연속 이름을 올렸다. 기재부에서 4년 연속으로 이름을 올린 간부는 그가 유일하다고 한다.
반면 그는 윗사람에 대한 의전에는 약하다며 오히려 주변에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일로 인정받지, 고개를 숙여가며 인정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제 금융업계에선 사실상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萬人之下)’가 됐다. 그의 소신 행보가 계속될지 주목된다.
전용기 파이낸셜뉴스 기자 courage@fnnews.com
발탁 가능성 MB정부 인사는 천영우 전 수석 첫손가락 연합뉴스 그런 측면에서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천 전 수석은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로 이름을 날린 대북협상 전문가다. 대북 강경론자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북한 측과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외교 관료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지난 1977년 외시 11회에 합격, 당시 외무부에 들어와 유엔대표부 참사관,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 파견관, 국제기구정책관, 유엔대표부 차석대사, 외교정책실장 등을 두루 거쳤다. 특히 지난해 대선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방한계선(NLL) 발언 여부를 놓고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대화록을 본 적은 있다. 비밀이니 내용은 말할 수 없다”고 말해 민주통합당으로부터 고발당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어떻게 보면 큰 빚을 진 셈이다. 천 전 수석은 청와대를 떠나며 페이스북에 “이명박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저도 36년간의 공직을 마감하고 초야로 돌아간다”고 밝혔다. 지난 2월 고향인 밀양에 찾아 잠시 휴식을 가졌던 천 전 수석은 향후 외교안보 관련 새로운 포럼을 만들어 외교안보 관련 아젠다(의제) 생성에 나설 계획이다. 김대기 전 청와대 정책실장도 경제 관련 분야에서 중용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경제수석을 겸임했던 김 전 실장은 경제기획원(EPB) 출신으로 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경제기획원 후배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선배 관료 중 한 명이다. 신임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과 전임 경제수석이던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과 경기고등학교 동기이기도 하다. 고교 동기들이 정부를 바꿔가며 경제수석을 줄줄이 하고 있는 셈이다. 김 전 실장은 노연홍 전 청와대 고용복지수석, 김동수 전 공정거래위원장과 함께 이달 말 차마고도(茶馬古道)로 떠나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이번 장관 인선 때 임종룡 전 국무총리실장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 관계에서 적잖게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만큼 임 전 실장에 대한 공직사회의 평가는 후하다. 행정고시 24회로 공직을 시작해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과 기조실장을 지내면서 탁월한 정책조정 능력을 인정받아 청와대 경제비서관으로 발탁됐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에서 귀한(?) 호남(전남 보성) 출신이라는 장점도 갖고 있다. 전용기 파이낸셜뉴스 기자 courage@fn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