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한 청와대 관계자가 “청와대에 근무하게 됐을 때 걱정이 많았었는데, 막상 와 보니 다들 너무 점잖고 좋은 분들이어서 놀랐다. 이렇게 좋은 분들이 모여 있는 조합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운을 뗀 게 계기가 됐다. 그는 “이번 청와대 수석들은 그야말로 매너가 몸에 밴 분들이고, 다들 하나같이 좋은 분들이어서 열린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의 발언은 “청와대 비서실장이고, 수석이고, 비서관이고 도통 접촉할 수가 없다. 만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는 기자들의 볼멘소리 끝에 나온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발언은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자화자찬 성격이 짙었지만, 이들이 풀어놓은 얘기 속엔 기자들이 보기에도 수긍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VIP가 좋아하는 사람, VIP가 등용하는 사람들은 모종의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 특히 듣는 이의 귀를 잡아당겼다.
앞서의 청와대 관계자가 말하는 청와대 수석들의 공통점이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오픈 마인드’를 갖췄다는 점, 일이 많을 때엔 새벽에 잠시 퇴근했다 아침 일찍 출근할 정도로 워커홀릭의 면모가 있다는 점, 하지만 좀처럼 자신의 공을 드러내기 위해 나서는 일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에 충실하다는 점, 그래서 아직까지는 기자들과 만나거나 전화 취재에 응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요약된다.
한마디로 튀는 일이라곤 없는, 착하고 충실하고 전문성 있는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이는 하루 수십 통의 전화를 걸어도, 갖가지 애절한 멘트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도 도통 접촉할 수가 없는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들을 지켜보면서 기자들이 농반진반으로 투덜대며 내놨던 평가와 너무도 흡사하다. 그 평가는 “수석들과 비서관들이 대통령의 말을 너무 잘 듣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이처럼 말 잘 듣는 참모진에 대해서는 여권 내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초반부터 박 대통령이 불통 논란에 휩싸이자 당시 새누리당의 한 친박계 중진 의원은 기자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VIP 옆에 직언할 수 있는 참모가 단 한 명도 없다”며 우려를 표했다.
이 의원은 인수위 초반 박 대통령이 인수위원들에게 강력한 ‘입 단속’ 지침을 내리고, 그에 따라 인수위가 ‘깜깜이’라는 평가를 받는 상황을 특히 걱정했다. 이 의원은 “국정운영을 이런 식으로 한다면 ‘시스템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1인 통치’로 가게 된다”며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은 높아질지 모르겠지만 잘못될 경우 모든 화살을 대통령이 다 맞게 된다”고 말했다.
이 의원의 불안한 예고가 기우가 아니었다는 게 입증되기까진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특히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부터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이르는 5명의 ‘인사 사고’ 과정은 박 대통령의 1인 통치가 얼마나 여론과 괴리될 수 있는지, 그로 인해 박 대통령이 얼마나 큰 정치적 부담을 떠안게 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박 대통령이 부처 업무보고 등서 시시콜콜 지시를 내리는 것을 두고 ‘깨알 리더십’이라는 냉소 섞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청와대가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사퇴해 버린 김종훈 황철주를 제외하곤 이들이 사퇴하는 과정도 깔끔하지 못했다. 특히 김병관 전 후보자의 경우 30가지가 넘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이미 여론의 평가가 끝난 상황이었지만 박 대통령은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시간을 지체했다. 지난 3월 11일 국회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무산됐는데도 그를 정식 임명하지도, 그렇다고 낙마시키지도 않은 채 시간을 끌다가 3월 22일에야 자진 사퇴 하도록 했다.
그 사이 여론은 악화될 대로 악화됐고, 김 전 후보자도 더할 수 없는 고충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김 전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위증죄를 범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때까지 청와대 참모 중 어느 누구도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그를 낙마시켜야 한다는 건의를 대통령에게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책면에서도 1인 통치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나온다. 박 대통령이 정부 부처 업무보고나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등에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일일이 다 지시하고 주문을 내리는 것을 두고 ‘깨알 리더십’이라는 냉소 섞인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박근혜 어록이 나오는 날이면 윤창중·김행 청와대 대변인은 발언 내용을 일일이 브리핑하느라 헉헉댈 정도다. 이는 책임장관제를 실현해 장관들이 휘둘리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하겠다던 당초 대통령의 약속과도 배치된다는 지적이다.
1인 통치 스타일에 갇힌 대통령, 아무 말도 못하고 대통령 얼굴만 쳐다보는 참모들을 지켜보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표정에선 착잡함과 근심이 묻어난다. 이 때문에 ‘이대로는 안 된다’는 기류도 나타나고 있다. 새누리당 한 의원은 “청와대 내에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참모가 없다면 여당이 나설 수밖에 없다”며 “이제 제대로 된 당·청관계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4월 재·보궐선거와 5월로 예정된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거를 주목해야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4월 재·보선을 통해 친박계 핵심이면서도 당내에서 나름의 리더십을 인정받고 있는 김무성 전 의원이 원내에 들어오고, 원내대표 경선에서 ‘할 말은 하는’ 인사가 선출될 경우 당·청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