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관급 자리 25명 중 관료 출신이 아닌 이들은 단 5명이다. 사진은 지난 3월 16일 열린 장·차관 워크숍. 사진제공=청와대
박근혜 정부에서 경찰청장이나 중소기업청장, 국세청장(이상 차관급)처럼 조직 수장이 아닌 국무총리나 경제부총리, 장관 등을 모시고 일하는 각 부처의 차관급 자리는 모두 26개다. 현재 26개 자리 중 ‘성접대 의혹’을 부인하며 자진사퇴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제외한 25개 자리가 채워져 있다.
그런데 차관 25명 중 관료 출신이 아닌 이들은 단 5명에 불과하다. 윤종록 미래창조과학부 2차관(연세대 교수 출신)과 나승일 교육부 차관(서울대 교수), 백승주 국방부 차관(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박종길 문화체육관광 2차관(태릉선수촌장), 고영선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한국개발연구원 연구본부장) 등이다. 나머지 20명은 모두 행정고시나 외무고시, 기술고시 등 고시 출신이다. 법무부 차관도 사법고시 출신이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비관료 출신은 이들 5명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처럼 관료 출신들이 대거 차관에 임명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주장해온 ‘창조경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나 공약 입안자, 정책 적임자 중에서 임명되는 장관들과 달리 차관들은 조직 내부의 논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장관은 청와대나 국회 보고, 각종 외부 행사 등 정무적인 일을 하느라 시간을 뺏기는 데 반해 차관들이 실제 업무를 맡아서 처리한다. 심하게 얘기하면 장관은 방향을 제시하는 조타수에 불과하고, 차관이 실질적인 부처의 선장인 셈이다.
이 때문에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려고 할 때 관료사회가 해당 업무 전문가인 차관을 중심으로 뭉칠 경우 장관은 이를 설득해내기 힘들다. ‘그립(조직을 장악하는 힘)’이 강한 이들이 장관에 적임이라는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실제 차관들의 힘은 막강하다. 부처 내부 인사도 차관이 알아서 짜는 경우가 많다. 외부에서 들어온 장관들이 누가 업무 적임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기획재정부 차관은 인사를 도맡아서 했다. 강만수 전 장관을 제외하면 이명박 정부에서 강력한 발언권이 없다보니 기재부 차관이 짠 인사가 그대로 재가가 난 경우가 적지 않다. 한 기재부 출신 인사는 “차관이 인사안을 장관에서 보고를 했는데 단 한 명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사인을 받은 경우도 있다”며 “차관에게 인사를 아예 맡겨놓아 버리는 장관도 있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는 장관보다 차관 출신이 관련 업계를 쥐고 흔든다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과거 건설교통부 시절 외부 출신(대개 재무부) 장관들이 많이 오다보니 실제 업무 전문가인 차관들에게 힘이 쏠린 탓이다. 노무현 정부 첫 차관이었던 최재덕 전 차관은 이명박 정부에서 대한주택공사 사장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마지막 차관이었던 이춘희 전 차관은 새만금경제자유구역청장과 인천도시개발공사 사장을 지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초대 차관에 임명됐던 권도엽 전 장관의 경우 2년 8개월간 차관으로 재임한 뒤 1년 10개월간 장관으로 일했다. 그만큼 차관의 영향력이 센 셈이다.
이러한 차관 자리에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이가 앉게 되면 당장 부처의 모든 시선은 장관이 아닌 차관에게 쏠리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명박 정부 시절 ‘왕차관’이라고 불리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2차관이다. 박 전 차관은 취임식에서 대외무역의존도와 자원대외의존도 수치 등을 언급하며 신시장 개척을 통해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가자는 말을 했다. 또 대중소기업 간 상생을 주문하는 등 ‘장관급 취임사’를 해서 눈길을 끌었다. 박 전 차관이 임명된 뒤 친박계인 최경환 전 지경부 장관(현 새누리당 의원)은 묻혀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지 않은 곳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부처에서 차관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다보니 부처 공무원들은 장관만큼이나 차관이 누가 되느냐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관료들 입장에서는 직접 함께 몸을 비비며 일하고, 급할 때 조직을 위해 앞장서주며, 인사에 영향력 행사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장관보다는 차관인 까닭에서다. 차관은 현행 국회 인사청문회 대상인 60명에 들어가지 않아 장관들처럼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낙마하거나 상처투성이로 자리에 앉을 염려가 없다. 게다가 장관에 비해 차관은 교체되는 일이 적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장관들 운신의 폭을 좁히고 나서 조직 내에서 관료 출신 차관들의 힘이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박 대통령은 지난 3월 18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신뢰 정부는 공약을 지키는 데서 시작된다. 장관들이 중심을 갖고 해야 되는 것은 4대 국정과제로, 각 부처가 어떻게 이를 해결할 것인지 전념하라”면서 “장관이 취임해서 새로운 자기 어젠다(의제)를 추구하면 (대선) 공약이 지켜지지 않는다. 신뢰 정부는 공약 따로, 장관 어젠다 따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말은 장관들에게 자율권을 주지 않겠다는 것으로, 대선과정에 주장해왔던 책임장관제와는 백팔십도 다른 말이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의 인사를 보면 너무 관료 출신에 기대는 경향이 크다. 특히 장관들에게 어젠다를 내지 말라고 하면 결국 각 부처에서는 전문가인 차관을 중심으로 대통령 공약에 맞춘 정책 만들기에만 열중하게 돼 부처 간 칸막이가 되레 높아질 수 있다”며 “장관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차관에 관료 출신을 대거 앉힌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와 인사는 창조경제를 하겠다는 기존의 공약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준겸 언론인
국방부는 물차관? 국방부 특유의 이중구조와 8명의 현직 대장의 존재 때문에 차관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를 감안했는지, 새 정부 첫 국방부 차관에 박근혜 대통령은 민간인 출신인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을 앉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