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대철 민주당 대표 | ||
일요일이었던 지난 8월31일. 모두가 쉬는 공휴일이었지만 여의도 정가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정대철 민주당 대표와 박주선 의원, 그리고 한나라당 박명환, 박재욱 의원 등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금배지 4인방’에 대한 검찰의 ‘긴급체포’ 여부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다. 전날 임시국회가 끝나고 다음날 정기국회가 개회됨에 따라 이날 하루는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이 적용되지 않는 ‘방탄 해제’의 날이었던 것.
9월1일부터 소집되는 정기국회는 12월9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8월31일 당일 이들 의원들을 강제구인하지 못하면 국회 내에서 체포동의안이 통과되지 않는 이상 검찰은 함부로 이들에게 ‘손을 댈 수’ 없는 상황. 그런 까닭에 자연 이들 ‘4인방’과 검찰의 움직임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여의도 일각에선 이날 하루 이들 의원들이 ‘숨어서 지낼 것’이란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불체포특권과 관련된 흉흉한 소문을 뒤로한 채 운명의 8월31일은 ‘아무 탈 없이’ 지나가고 말았다. 다음날인 9월1일 정기국회가 열리면서 ‘방탄 국회’ 논란을 불렀던 4명의 의원들은 24시간 동안 누리지 못했던 ‘불체포특권’을 다시 얻게 됐다.
31일을 앞두고 검찰의 분위기는 대체로 ‘무리수는 두지 않겠다’는 쪽이었다. 설사 이날 해당 의원들을 강제구인한다 해도 하루 만에 혐의를 확인하지 못할 경우 다음날 국회 회기가 시작되면 풀어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
하지만 일부 소장 검사들 사이에선 ‘강경 대응설’이 나돌기도 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지만 정치인들의 경우 시선을 의식해 한밤중이나 이른 아침에 기습적으로 강제구인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8월30일 잠자리에 들기 위해 귀가했다가 자정이 되자마자 검찰의 기습 방문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정객들은 “8월31일은 해당 의원들에게 무척이나 긴 하루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과연 이들 의원들은 이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의원들 중 가장 관심을 끈 이는 단연 정대철 민주당 대표. 굿모닝시티 윤창렬 대표로부터 불법 자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정 대표에겐 지난 7월18일 검찰의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
외부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이날 정 대표는 의원 4인방 중 가장 ‘활동적’인 하루를 보냈다. 오전에는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중구 내 교회를 찾아 예배를 했으며 지역구민들과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오후엔 당사에서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열어 역대 대통령들로부터 받은 명절 선물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정 대표가) 떳떳한 만큼 평소와 다름없는 공개적 활동을 한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정 대표는 사실 이날을 전후로 매우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30일에는 신당동 집으로 귀가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으며 다음날에는 승용차를 바꿔타고 아예 휴대폰도 갖고 다니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정 대표 주변에선 “며칠 전부터 (정 대표 측근들이) 대책회의를 갖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30일 밤 행적에 대해 정 대표 측근들은 “정확하게 어디서 (정 대표가) 묵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가에선 “지역구에서 주민들과 함께한 것이나, 뜬금없이 전직 대통령 명절선물과 관련한 기자간담회를 연 것 모두 검찰의 ‘돌출행동’을 의식해서가 아니겠는가”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지난 3월19일 자신이 운영하는 대학의 공금 횡령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한나라당 박재욱 의원의 ‘31일’도 편치 않았던 듯하다. 박 의원은 하루 전인 지난 30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선 뒤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지역구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박 의원의 휴대폰도 불통이었는데 박 의원측에 따르면 휴대폰을 승용차 충전기에 꽂아둔 채 비행기에 올랐다고 한다.
지난 30일 저녁부터 31일 오후까지 몇 차례의 전화취재에서 박 의원측은 “(박 의원이) 지역구에 있는 것으로 안다. 구체적인 소재는 파악이 안된다”고만 밝혔다. 박 의원이 서울 집으로 돌아온 것은 31일 밤 10시께. 이후 박 의원측은 “(박 의원이) 지역구인 경남 청도에 다녀왔으며 오는 길에 지역 특산물인 복숭아 한 상자 가지고 온 것을 보니 지역 분들과 함께 계셨던 것 같다”고 밝혔다.
지난 6월20일 세무조사 무마 청탁 관련 금품수수 혐의로 대검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박명환 의원. 박 의원의 경우도 지난 30일과 31일 행적이 ‘묘연’했다. 박 의원의 측근들은 “(박 의원이) 별다른 일정 없이 휴식을 취했다”고 밝혔다. 박 의원 역시 지난 30일 밤 귀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박재욱, 박명환 의원측 모두 ‘돌발사태’를 우려해 몸을 피했다는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 박주선 민주당 의원 | ||
박 의원은 “30일과 31일 일정 모두를 취소하고 집에서 휴대폰을 켜놓은 채 있었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내가 집을 비우거나 행여 전화라도 받지 않으면 ‘잠적했다’는 소릴 들을 것 아닌가”라며 “집에 머물면서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박 의원은 “난 오히려 빨리 검찰조사를 받고 싶은 사람인데 언론에서 내가 불체포특권이 사라지는 31일에 초조해할 것이라 보도하는 것을 보고 무척 불쾌했다”고 심경을 내비쳤다.
얼마 전 나라종금 관련 의혹에 대해 이미 대검에서 기자회견까지 한 바 있는 박 의원은 “언론에서 너무 흥미 위주의 기사를 쓰지 말았으면 한다. 나도 그렇고 정 대표도 그렇고 모두 검찰 조사에 응했으며 거처가 분명한 사람들인데 무엇이 두려워 피하겠나”라고 덧붙였다. 4명 의원들 중 지난 30일 밤 집을 떠나지 않은 사람은 박주선 의원이 유일하다.
한편 31일 검찰의 긴급체포권 발동이 없었던 것에 대해 검찰의 한 관계자는 “형평성과 보안 문제 때문에 네 사람에 대한 강제구인이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정대철 대표는 서울지검에서 조사중이고 박주선, 박명환 의원은 대검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박재욱 의원 사건은 대구지검 소관”이라며 “불과 하루 만에 이 네 사람의 신병을 동시 확보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긴급체포를 위해서는 법원으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야 하는데 대검 서울지검 대구지검에서 일사천리로 동시에 이뤄지기 힘든 일이었다는 것.
검찰의 다른 관계자는 4명의 문제 의원에 대한 강제구인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사안이었다고 풀이했다. 이 관계자는 “곧 대통령과 국회의장 그리고 여야 대표가 만나는 5자회담이 열리는데 이날 검찰이 ‘행동’을 개시했더라면 정치권 화합 기류에 ‘고춧가루 뿌린다’는 비난과 부담을 떠안아야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 관계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검찰은 당초 31일 강제구인에 대해 포기한 상태였는데 박주선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들이 모두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