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사진기자단
김대변인은 상기된 표정으로 “대통령께서는 오늘 지하벙커에 가신 일이 없다. 따라서 이 기사는 명백한 오보”라고 힘줘 말했다. 김 대변인은 이어 “정부는 최근 안보상황에 대해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다”며 “대통령께서도 오늘 안보 상황뿐 아니라 부동산 대책을 비롯한 일반 현안 관련 보고도 받으셨다”고 덧붙였다.
청와대발 기사에 대해 대변인이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대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이날 김 대변인의 백브리핑은 여느 때와는 강도가 좀 달랐다. 기자들 사이에선 사안이 ‘VIP’, 즉 대통령과 관련된 것도 한 가지 이유겠지만 그보다는 ‘대통령이 지하벙커에 갔다’는 부분이 특히 청와대의 신경을 건드린 것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나왔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그동안 지하벙커에 대해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하벙커’는 청와대 관계자들과 언론이 부르기 쉽게 사용하는 용어일 뿐, 정식 명칭은 ‘청와대 국가안보실 예하 위기관리센터’다. 정부조직법 개정 이전 이명박 정부 때까지는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예하 국가위기관리상황실’로 불렸다.
지하벙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박 대통령의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지난 1975년 전시 대피시설 용도로 만들어졌다. 그 후 방공호처럼 방치돼 있다가 지난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현재와 같은 국가위기관리 컨트롤타워용 시설, 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황실로 탈바꿈시켰다. 이때부터 이곳에서 육·해·공군과 경찰청, 소방방재처 등 안보 및 위기관리 관련 주요 기관의 상황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국내에서 운항 중인 항공기나 선박 등과 교신도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졌다.
이 지하벙커를 가장 ‘애용’했던 이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취임 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기존 지하벙커 옆에 비상경제상황실까지 꾸렸다. 안보 위기 상황이 아니더라도 지하벙커에서 회의를 여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반면 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껏 좀처럼 지하벙커를 찾아가는 일이 없었다. 지난 2월 25일 취임 후 북한이 줄기차게 도발 위협을 가하고 있지만 박 대통령이 지하벙커를 방문한 것은 단 한 차례뿐이었다. 그것도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3월 8일 청와대 직원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들렀을 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지하벙커’에서 회의를 여는 일이 잦았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그곳을 찾은 것은 단 한 차례뿐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 대통령이 이처럼 지하벙커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청와대 관계자들은 반드시 필요해서 만들어놓긴 했지만 지하벙커 자체가 부정적 어감과 인상을 풍긴다고 말한다. 한 관계자는 “지하벙커는 음침하고 폐쇄된 공간, 그리고 대피하는 공간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이 모든 게 박 대통령이 생각하는 국정운영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실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지하벙커에서 회의를 했다’고 하면 국민들은 음침한 곳에서 소수의 권력자들이 국정을 주무른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면서 “특히 북한의 도발 등 안보 위기의 순간에 지하벙커에서 회의를 열 경우 ‘숨어 들어갔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보다 근본적으로 최근 안보 위기와 관련해 박 대통령이 견지하고 있는 ‘차분한 대응 원칙’에 지하벙커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행 대변인이 “잘못된 기사가 나가면 국민들이 불안해한다”고 말한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도 “대통령이 지하벙커에서 회의를 열었다고 하면 국민들은 ‘무슨 큰일이 벌어졌나보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국민들에게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대통령이 지하벙커를 찾아간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도 같은 이유로 지하벙커라는 표현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하벙커 회의에 대해 “국민이 오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필요 이상의 위기감과 불안감을 줄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길을 가려고 하는 박 대통령의 의지가 지하벙커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진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박 대통령은 정부조직 개편과 인사 스타일, 국정운영 스타일 등에서 철저히 이 전 대통령과 다른 행보를 걷고 있다. ‘ABMB(Anything But MB·MB만 아니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 전 대통령이 걸핏하면 지하벙커를 찾아가 회의를 열었던 것 역시 박 대통령이 곱게 봤을 리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이야말로 더 없이 진지하고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데, 그런 관점에서 이 전 대통령의 지하벙커 회의는 진정성이 없는, 보여주기 식 행태로 비쳤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지하벙커에 거부감을 보이는 박 대통령은 그곳을 찾지 않을 수 있을까. 안보 이슈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 전·현직 청와대 관계자들은 “찾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전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대통령 집무실에서 보고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지하벙커에 가야 상황판을 보면서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직 청와대 관계자도 “벌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불필요한 불안감을 조성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지하벙커에 안 가겠다는 생각은 아닐 것”이라며 “4월 10일에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다면 대통령이 지하벙커에서 보고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