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KB금융지주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 8명의 선임안이 가결됐다. 어윤대 회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사외이사 제도는 우리 스스로 시행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다.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 땅에 국제통화기금(IMF)이 들어왔다. 재벌로 대변되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지배구조를 들여다본 IMF는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경영진의 독단을 막기 위해 전문성을 갖춘 외부인의 참여를 ‘권고’했다. 당시 우리의 현실은 IMF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지수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변호사)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겼다”며 “중요한 것은 내·외부가 아니라 독립성인데, 우리 기업은 마치 외부에서 사람만 데려오면 그만인 것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경영진의 독단을 견제하기 위한 당초 취지가 무색해진 이유다.
현재 일반 기업의 경우 상법에 따라 이사회의 3분의 1을 사외이사로 꾸려야 한다.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은 이사회의 과반을 사외이사로 채워야 한다. 지난 4월 1일 기준 삼성전자 이사회는 사내이사 4명, 사외이사 5명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 자산은 181조 원. 자산 121조 원인 현대자동차 역시 4명의 사내이사와 5명의 사외이사로 이사회가 구성돼 있다. 자산 31조 원인 LG전자 이사회는 사내이사가 2명, 기타비상무이사(비상근)가 1명, 사외이사가 4명이다. 자산 25조 원이 넘는 SK텔레콤 이사회는 사내이사 3명, 사외이사 5명, 모두 8명으로 구성돼 있다.
대다수 기업은 중대한 일을 이사회에서 결정한다. 따라서 사외이사가 과반인 웬만한 대기업에서는 만약 사외이사들이 반대하면 사업을 추진할 수 없다. 사외이사들의 반대로 KB금융이 ING생명을 인수하지 못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심지어 기업 오너의 결정도 사외이사를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 그만큼 사외이사의 권한은 막강하고 책임은 막중하다.
주요 기업 사외이사들의 평균 연봉은 대개 8000만 원이 넘는다. 지난해 삼성전자 사외이사의 1인당 평균 연봉은 8900만 원, 현대자동차가 8400만 원, SK텔레콤이 8500만 원, LG전자가 7800만 원이다. 사외이사들은 1년에 10차례 안팎의 정기·임시 이사회에 참석, 의결권을 행사하고 수천만 원의 연봉을 받아가는 셈이다. 그나마 불참하는 경우도 있다. 재계 고위 인사는 “이만큼 행복한 직업도 없을 것”이라며 “게다가 대부분 본업이 있기 때문에 기업 임원들은 임기를 꽉 채운 사외이사를 꽤 부러워한다”고 귀띔했다.
재벌기업들의 사외이사들이 이처럼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까닭은 해당 기업 혹은 오너 일가와 이해관계에 있거나 학연 등으로 연결돼 있는 탓이다. 지난 2월 27일 경제개혁연구소가 발표한 ‘사외이사 및 감사의 실질적 독립성 분석’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51개 대기업집단의 250개 상장 계열사의 이사 수는 모두 1685명. 이중 사외이사는 808명으로 전체 47.95%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계열사 임원 출신이거나 전략적 제휴 관계에 있는 회사 출신, 해당 대기업의 소송대리인 혹은 법률자문 출신, 정부 또는 채권단 출신 등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는 사외이사 비율은 16.09%였다. 또 오너 일가와 학연으로 연결되는 사외이사는 12.62%. 이를 합하면 전체 사외이사 중 28.71%가 해당 기업이나 오너 일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다. 즉 이사회 구성원 중 3분의 1가량은 회삿일에 거의 찬성표를 던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외이사들의 전문성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해당 기업과 사업에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여야 올바른 견제와 감시 기능을 발휘할 텐데 지금의 사외이사들이 과연 전문가들이냐는 지적이 만만치 않은 것. 대형 법무법인(로펌)이나 고위 관료 출신 사외이사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당초 취지와 달리 기업들이 사외이사들을 ‘로비용’, ‘보험용’으로 영입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많은 기업은 삼성(15명), 현대차(14명), SK(14명), 동부(14명) 순으로 나타났다. 법조계 출신 사외이사는 두산(10명), SK(9명), 삼성(7명), 현대차(7명), 롯데(5명), CJ(5명), LG(4명), 한진(4명) 순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솔직히 사외이사추천위원회가 있기는 하지만 유명무실하다”며 “신규 선임되는 사외이사들은 임기 만료되는 사외이사들이 대신 추천하거나 기존 사외이사들이 오너 눈치를 보며 알음알음 추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오너 일가나 측근이 이사회에 참석하는 상황에서 사외이사들이 반대하기는 쉽지 않다”고 전했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심지어 “겉으로는 경영진의 독단을 견제한다지만 속으로는 고액 전문직 일자리를 늘려주는 셈”이라고 비난했다. “코스닥업체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하는 재계 인사도 적지 않다. 이수정 연구원은 “이 같은 상황에서 독립성을 바라기는 힘들다”며 “현행 법령을 개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더욱 적극적인 개선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현황은 금융사도 마찬가지다. 일반 기업과 달리 금융사의 경우 감시와 견제 기능이 더 철저해야 한다. 금융사 특성상 경영진의 독단과 전횡이 일어난다면 특혜 등의 시비와 비리에 연루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금융사 사외이사들도 재벌기업들의 사외이사들과 마찬가지로 이사회에서 거의 모든 의결사항에 ‘찬성’표를 던져왔다.
삼성그룹 서초동 사옥.
딱 한 번, 지난해 12월 5일과 18일에 열린 KB금융 이사회에서 9명의 사외이사 중 과반인 5명이 반대를 표명했고 2명은 ‘보류’ 의견을 냈다. 9명 중 2명만 찬성한 것. 이것이 바로 ‘ING생명보험 인수 계약 및 자회사 편입 승인(안)’이다. 반대 사유는 ‘국내 보험산업 전망 불투명, 국내외 경기 침체에 따른 리스크 관리 필요성, 가격 적정성 문제 등’이다.
지난해와 올 초 국내 4대 금융지주에서 열린 중요의결사항 중 유일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을 뿐 아니라 과반이 반대했던 이 일은 그동안 ‘거수기’로 표현됐던 사외이사들을 ‘숨은 권력’으로 표현하게끔 했다. 그러나 이지수 변호사는 “KB금융의 ING생명 인수 반대야말로 진정한 사외이사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며 “정말 필요한 사업이고 꼭 인수해야 했다면 경영진이 이사진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 의무고 책무”라고 지적했다.
흥미로운 점은 금융사들의 이사회는 일반 기업보다 사외이사 비중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KB금융은 지난 3월 29일 기준 12명의 이사 중 어윤대 회장과 임영록 KB금융 사장, 민병덕 KB국민은행장을 제외한 나머지 8명이 모두 사외이사다. 우리금융은 8명의 이사 중 이사회의장을 맡고 있는 이팔성 회장을 제외한 7명이 사외이사다. 우리금융 측은 “부회장 직책이 없어지고 나서 사내이사가 이 회장 1명으로 줄어들었다”고 답했다. 신한금융 역시 이사회를 구성하는 12명의 이사 중 사내이사로 등기돼 있는 한동우 회장 등을 제외하고 10명이 사외이사다.
이 같은 이유로 재벌기업과 달리 금융사는 사외이사들을 통해 정부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외이사가 과반만 돼도 법 규정을 충족시키는 것인데 이사회의 대다수가 사외이사기 때문이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우리금융의 경우 이형구 예금보험공사(예보) 저축은행지원부장이 사외이사로 등기돼 있다. 예보가 우리금융 최대주주지만 공공금융기관이라는 점에서 해당 직원을 사외이사로 선임한 것은 의심을 살 만하다.
금융사 사외이사들은 ‘경영진 선임에 관한 사항’에 대해서도 찬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외이사들에 밉보였다가는 경영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다. 특히 일부 금융사는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를 구성해 최고경영자(CEO)까지 선택, 결정할 수 있다. 이 역시 KB금융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일각에서는 사외이사들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책임은 별로 지지 않는다는 비난도 제기되고 있다.
사외이사들의 권한 역시 정부와 금융당국에서 나온다는 얘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지수 변호사는 “금융사 사외이사들의 의견을 정부 입김으로 연결시키기는 무리”라면서 “금융사의 지배구조와 경영은 훨씬 깨끗해야 하기 때문인 듯하다”며 금융사에 유독 사외이사가 많은 이유를 설명했다.
포스코와 KT처럼 일반 기업에서도 사외이사들이 회장을 결정할 수 있다. CEO후보추천위원회에서 회장 후보를 올리면 이사회에서 해당 후보에 대해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결정한다. 포스코와 KT의 경우 민영화된 공기업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정부 입김이 CEO후보추천위원회나 사외이사를 통해 전달된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금융사들의 경우와 비슷한 것. 그러나 포스코 관계자는 “CEO후보추천과 선임 과정은 물론 사외이사 추천과 선임 과정에서도 그 어떤 외압이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무용론이 대두되고는 있지만 사외이사 제도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전문가는 드물다. 오히려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현 정부 아래서 사외이사 제도가 강화될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단순히 법 개정만으로 제도를 강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이 바라는 공통점은 사외이사 제도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경영진을 견제할 수 있는 사외이사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지수 변호사는 “소액주주들이 직접 사외이사를 추천해 해당 기업이 소액주주를 대표하는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두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