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삼탁 씨 유족들이 소송을 통해 되찾은 서울 강남의 600억대 빌딩.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한 고인이 남긴 유언이 5년 만에 여러 가지 사회적 의혹을 낳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거액의 유산을 얻은 한 가족의 일화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유언의 장본인이 바로 노태우 정권 실세로 유명한 고 엄삼탁 전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이기 때문이다. 엄 씨가 생전에 이 빌딩을 매매하기 위해 지불한 자금의 출처를 놓고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일각에선 노태우 정권 시절 무소불위의 상징인 안기부 기조실장이었던 엄 씨가 당시 안기부 운영 예산을 비자금 명목으로 빼돌린 것이 아니냐는 의혹마저 나왔다. 뒤늦게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낸 빌딩 한 채가 갖가지 의혹의 메카로 회자되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의혹의 심증은 남아있는 상황. 엄삼탁 씨 유족의 유산 소송전을 뒤쫓아봤다.
고엄삼탁 전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은 지병으로 고생하던 2008년 무렵 자신의 명이 다했음을 느꼈다. 엄 씨는 마침 자신을 병문안 온 후배에게 W 빌딩 관련 인감증명이 첨부된 확약서 및 각서와 위임장을 건네며 “이 토지와 건물은 원래 내 소유인데 사정상 고등학교 선배 박 아무개 씨의 이름으로 명의신탁을 해 놓았다. 가족들이 박 씨한테서 다시 물건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당시 이 확약서에는 “부동산은 비록 본인(박 씨) 명의로 돼 있지만 실제 소유주는 엄삼탁입니다”라는 내용이 적시돼 있었다고 한다.
W 빌딩은 원래 2000년도 무렵까지 S 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권 아무개 씨 형제의 소유였다. 당시 엄 씨는 권 씨 형제에게 돌려받을 250억 원 상당의 채권이 있었는데 정확한 액수에 대해선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경영난으로 인한 재정악화로 권 씨 측 회사가 문을 닫을 처지에 놓이자 엄 씨에게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던 권 씨 측은 W 빌딩과 해당 토지를 대물 변제의 형태로 엄 씨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엄 씨 역시 권 씨 측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 채권 회수가 힘들어질 것을 우려해 W 빌딩을 매입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박 씨가 등장한다. 박 씨는 엄 씨의 고등학교 1년 선배로서, 엄 씨가 사단법인 한국씨름연맹 총재로 재임할 당시 절친한 동료였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 이에 대해 한 법조인은 “정치인 출신 유명인사였던 엄 씨 사정상 몇백억 원대의 거래를 드러내놓고 하기 껄끄럽다고 느꼈을 거다. 때문에 매수인으로서 물건을 구입했지만 명의를 다른 사람으로 하는 명의신탁 방법을 사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등기부상 토지의 소유권 이동을 보면 권 씨 측에서 박 씨 쪽으로 이동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엄 씨는 ‘제3자 명의로 등기돼 있다고 해도 소유권은 매도인에게 있다’는 부동산실권리자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을 십분 활용했던 것. 엄 씨가 재산을 은닉하려는 ‘꼼수’를 썼다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엄삼탁 전 안기부 기조실장. 임준선 기자
재판 과정에서 박 씨의 주장은 많은 허점을 드러냈다. 박 씨의 주장대로 W 빌딩을 엄씨로부터 매매한 것이 사실이라면 매매금의 경로가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데 두 차례 소송에서 박씨의 진술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박 씨는 “매매금 명목으로 두 차례에 걸쳐 21억 4500만 원, 108억 5500만 원으로 나눠 지급했다”고 주장했다가 나중에는 “10억 원, 120억 원으로 나눠 지급했다”며 말을 바꿨다. 이에 재판부는 “큰돈이 오가는데 돈을 낸 당사자가 어떻게 지출했는지를 제대로 기억 못할 리가 없다”며 박 씨의 신뢰성 여부를 물었다.
이에 박 씨는 “엄 씨에게 매매금 명목으로 매달 일정 금액을 지급했다”며 재차 반박해왔다. ‘엄 씨에게 285억 원에 건물을 구입하기로 하고 계약금 10억 원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 275억 원은 건물로 인한 임대료 등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갚아나가기로 했다’는 주장이다. 재판부는 박 씨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판단했다. 쉽게 말해 20분의 1 가격만 현금으로 받고 소유권을 넘겨주는 계약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재판부는 박 씨에게 “엄 씨의 아내에게 W 빌딩 지분 7분의 3을, 엄 씨의 두 자녀에게 각각 7분의 2씩 이전 등기하라”며 엄 씨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5년간의 소송, 어렵사리 되찾은(?) 275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유산. 사건은 끝났지만 단순히 명의신탁으로 벌어진 ‘유산’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전직 안기부 기조실장’이라는 고인의 직책이 묘한 무게감을 준다. 특히 사건의 발화점이 된 250억 원의 출처도 석연찮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공무원 출신인 엄 씨가 권 씨 측에게 250억 원을 빌려준 과정이 투명하지 않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1심 재판부 역시 “엄 씨가 권 씨 형제에게 어떤 채권을 갖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적시한 바 있다.
엄 씨 유족 측은 1992년 3월경 엄 씨가 권 씨 형제에게 250억 원을 줬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엄 씨는 당시 안기부에 재직 중이었다. 육군 소장으로 갓 전역한 엄 씨가 250억 원을 마련할 만한 통로가 마땅치 않아 보인다. 또한 사망 직전에 와서야 W 빌딩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된 계기도 궁금증을 자극한다. 때문에 일각에선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문제로 검찰 조사를 받은 바 있던 엄 씨의 전력을 이유로 자금 출처를 수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이번 소송에 참여한 굴지 로펌의 한 관계자는 “판결상으로는 자금 출처에 대해 알 길이 없다. 다만 범죄로 생긴 비자금일 경우 공소시효가 안 지났다면 수사도 가능하다”면서도 “그러나 비자금이란 자체로 범죄 내용을 발견하기 어렵고, 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공권력이 투입돼 수사가 이뤄질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고 말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
엄삼탁 인물탐구 정권 바뀌고도 영전한 비결 뭘까 고엄삼탁 전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은 1965년 경북대 사범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ROTC 3기로 임관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수도경비사령부 인사주임 시절 당시 연대장이었던 노 전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엄 전 기조실장은 6공 실세로까지 이름을 날리기에 이른다. 비육사 출신임에도 노 전 대통령의 눈에 띌 수 있었던 데는 ‘9·9인맥’이 뒷받침됐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홍 교수의 <박정희의 후예들: 누가 그들을 다시 부르는가>(책보세 2012년 출간)에 따르면 ‘9·9인맥’이란 노 전 대통령이 9공수여단장과 9사단장을 지낼 때 그 휘하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던 인연을 가진 장교그룹을 뜻한다. 엄 전 기조실장도 ‘9·9인맥’에 속하는 인물로서 육사 21기 하나회 핵심 인사들과 함께 소장 진급을 하는 특혜를 받기도 했다. 군인으로 잘나가던 엄 전 기조실장은 예비역 소장으로 예편한 후 안기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9년 안기부 보좌관을 거쳐 이듬해 ‘핵심 실세’로 불리던 기획조정실장 자리를 꿰찼다. 당시 엄 전 기조실장은 노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각종 대규모 사업에 관여하며 거액을 주무른 것으로 전해진다. 대표적으로는 공사비만 5000억 원 이상이 소요된 내곡동 청사 신축사업이 있다. 이 사업에 엄 전 기조실장이 깊숙이 관여하며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까지도 이 과정에서 상당한 비자금을 축적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과거 안기부에서 근무했던 정병주 씨는 1998년 ‘2급 비밀’이라는 미공개 원고를 통해 “엄삼탁 기조실장 때 967억 원 이상이 청사신축특별회계에서 빠져나간 사실을 확인했으며 이는 정치자금으로 간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자 엄 전 기조실장은 병무청장으로 영전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관례상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면 정계에서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라 엄 전 기조실장의 행보는 단연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엄 전 기조실장이 안기부 자금으로 김영삼 후보에게 ‘잘 보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분석이 조심스레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엄 전 기조실장은 병무청장 업무를 본격적으로 보기도 전에 ‘슬롯머신 사건’으로 법정에 서면서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그는 체육계에 몸을 담으며 재기를 노렸다. 학창시절 씨름선수를 지낸 것을 바탕으로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거쳐 1998년에는 국민생활체육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2005년까지 회장직을 유지하면서 1999~2002년에는 한국씨름연맹 총재를 지내며 민속씨름 부활을 꾀했다. 이 같은 이력으로 홍조근정훈장, 체육훈장 기린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엄 전 기조실장의 정계 복귀는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1998년 김대중 정권 당시 막강한 조직력을 갖춘 여당 국민회의 후보로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섰으나 박근혜 후보와 맞붙어 패배를 맛봤다. 그 이후 엄 전 기조실장은 민주당 부총재와 대구시지부장을 역임하며 끊임없이 재기를 노렸으나 2002년 선거법 위반자로부터 사면시켜달라는 청탁의 대가로 8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또 다시 사법처리돼 결국 정계를 떠나야 했다. 이후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던 엄 전 기조실장은 2008년 2월 2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
기조실장의 막강권력 ‘부장은 짧고 실장은 길다’ 국가안전기획부의 권력은 ‘천하무적’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 그대로였다. 그중에서도 기획조정실장의 자리는 ‘핵심’이었다. 안기부 시절 직원들 사이에는 “부장은 짧고 실장은 길다”는 ‘격언’이 유행했는데 이는 안기부장의 생명(임기)은 짧지만 기조실장의 영향력은 길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기조실장의 힘이 막강했던 것은 안기부의 주요 업무를 도맡아했기 때문이다. 안기부의 운영예산을 책정·집행하는 것에서부터 인사까지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넘보지 못했다. 여기에 대통령의 사금고지기 역할까지 했으니 ‘절대권력’을 등에 업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기조실장은 대통령의 최측근이 낙점됐다. 한 번 자리에 오르면 정권이 바뀔 때까지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는데 엄 전 실장 역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심복으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안기부장의 경우 잦은 인사로 권력을 오래 누리기 어려웠으니 기조실장의 영향력이 더욱 강할 수밖에 없었다. 안기부장의 경우 노태우 정권 당시 2년 8개월 최장수 기록을 세운 서동권 전 안기부장을 제외하곤 평균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교체됐다. 하지만 기조실장은 정권이 바뀔 때까지 견고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게 바로 엄 전 기조실장인데 5공화국에서도 기조실장은 윤옥영 씨 한 사람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안기부는 현재의 ‘국가정보원(1999년)’으로 이름을 바꿨으나 여전히 중심축은 ‘국정원장’과 ‘기조실장’이 차지하고 있다. 국정원장이 국가 안보와 관련된 국내외 민감한 정보를 취합, 분석, 판단하고 특정 과업을 시행한다면 기조실장은 국정원의 조직과 예산운영을 책임진다. 여전히 기조실장이 국정원의 ‘2인자’인 셈이다. 이 때문인지 지금껏 대통령 최측근의 ‘낙하산 인사’가 단행되는 악습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2일 실무능력을 중심으로 한 인사를 단행했다. 새로운 기조실장으로 이헌수 앨스앤스톤 대표이사를 임명한 것. 이 기조실장은 마산고와 연세대 행정학과를 나와 1981년 공채를 통해 국정원에 몸담은 인물이다. 국정원 재직 당시 기획예산관과 원장(김성호)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2009년 강원지부장을 역임한 끝에 퇴직했다. 이 기조실장 발탁에 대해 정계 안팎에서는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부각하려는 인사”라는 호평이 나오고 있다. 다만 이 기조실장은 국정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부적절한 투자 알선 및 환매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상황이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