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몽’이라는 가명을 쓴 정 아무개 씨가 4월 25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지난 대선은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1인 시위를 했다. 이상민 인턴기자
지난 4월 19일 광화문네거리에 1인 시위가 시작됐다. ‘12·19 선거는 부정선거’라는 피켓을 든 이 남성은 ‘춘몽’이라는 가명을 쓴 정 아무개 씨(44). 정 씨는 광화문 1인 시위를 벌이기 이전에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14일간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였고 문재인 의원 사무실 앞에서도 선거무효투쟁에 참여해 줄 것을 촉구했다.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기야 문재인 의원은 지난 3월 “수개표 요구에 응하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고, 소송을 제기할 상황도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라고 언급하며 진화에 나섰다.
그럼에도 선거무효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과 맞물리면서 더욱 활성화될 분위기도 감지된다. 현재 수개표 청원 선거무효소송을 주도하고 있는 이는 한영수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노조위원장. 한 씨는 지난 2007년 선관위 내부에서 전자개표기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다 해고됐다. 그는 지난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때도 선거무효를 주장한 바 있다. 당시 일부 투표소에서 재검증이 이뤄졌지만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새누리당 한 당직자는 “당시 대선에 진 이후 당에 엄청난 압박이 있었다. 실제 이회창 후보가 결과를 뒤집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이도 꽤 됐다”라고 회상했다.
그래서인지 박빙의 승부가 예측되던 대선 직전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보수 진영에서도 한 씨의 주장에 일부 동조했던 듯하다. 지난해 12월 3일 국회에는 권영해 전 국방부 장관을 대표로 하는 ‘전자개표기 사용중단 권고결의 청원서’가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의 소개로 제출됐다. 사실 이 청원서는 한 씨 주도로 작성됐고, 권 전 장관을 통해 다시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에게 전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송영근 의원 측은 “당시 한 씨가 직접 의원실을 찾아 와 전자개표기 사용에 관한 문제점을 이야기 했고 그 취지에 일부 공감해 청원서를 올렸던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평소 친분이 있는 권영해 전 국방부 장관에게도 의견을 물었다”라고 덧붙였다. 해당 청원서에는 권 전 국방장관 외에도 고명승 성우회 회장,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 이화수 전 한나라당 의원 등 여권 인사가 주축이었다. 앞서의 새누리당 관계자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질 수도 있다는 분위기 아니었나. 이 때문에 패배할 경우 한 씨의 주장을 근거로 새누리당 진영에서 무효투쟁을 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 씨는 지난 25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지금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은 지난 대선 결과가 조작됐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기득권을 내놓지 않기 위해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선 직전 여권 인사들과 국회 청원을 제출한 것에 관해서는 “대선전이 한창일 때 새누리당 사람들이 내가 좌파라고 생각해서 회유하려고 부른 적이 있다. 그때 권영해 전 장관을 만났는데 그가 내 이야기에 공감했고 국회 청원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라며 “나는 선관위 직원이었고 밖에서 10년 넘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워 왔다. 새누리당이든 민주당이든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수개표 청원인들의 선거무효투쟁이 소송금액 자체에 목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현재 집단소송에 참여한 사람만 약 7000명으로 소송참가액은 1만 원 이상부터 제한을 두지 않고 있지만 실제 한 사람당 6만 1200원을 내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언론홍보를 위해서는 5000만~1억 원이 필요하다며 “독지가를 기다립니다”라는 안내 문구도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투표지 재검증을 위해 약 8억 7500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밝혔는데, 자세한 산출 근거는 나와 있지 않았다.
관련 사정을 잘 아는 한 정치권 인사는 “한 씨와 함께 소송을 이끌고 있는 소송인단 공동대표 김필원 씨는 전직 안기부 직원으로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비난하다 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소송을 주도하고 있는 한 미국 변호사는 대선 당일 김무성 선대본부장이 해킹툴을 이용해 전산을 조작했을 가능성을 주장했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의 한 변호사는 “해당 소송은 기존 자기들이 패소했던 소송의 근거와 동일하기 때문에 승소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며 “온라인을 통해 개인정보 제공 동의 절차 없이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고, 대신 인장을 만들어 소장에 찍는 등 준비 과정도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수개표 청원에 관해 민주당 대변인실 관계자는 “대선 당시 모든 투표소에 민주당 관계자들이 참관인 자격으로 개표 현장에 있었다”며 “선거결과 조작은 불가능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민주당 관계자는 “야권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에 힘을 모아 대응하는 것으로도 현 정권에 대한 압박을 가할 수 있는데 일부에서 벌이는 선거무효투쟁은 국정원 의혹마저 묻어버릴 수 있는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반면 소송에 참여한 박 아무개 씨는 “이번 소송은 수개표 청원뿐만 아니라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새누리당의 불법선거사무실 운영 등 대선 전반을 법리적으로 판단하자는 것”이라며 “의혹이 있는 부분은 확인하고 끝내면 되는 일이다. 뭐가 무서워서 민주당은 정부와 여당에 수개표 청원을 요구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2002년 대선 수개표 리플레이 한나라 명분도 돈도 잃어 지난 2002년 대선 역시 지금과 같은 수개표 청원 운동이 벌어진 바 있다. 대선 직후 인터넷에 유포된 ‘국가정보원 중견간부의 전자개표 조작의혹 양심선언’이라는 출처 불명의 글이 도화선이 됐고, 부정선거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당시 한나라당에서는 “수개표는 이회창 후보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 지지자들의 요구가 빗발쳤고 서명에 동참한 사람이 20만 명을 넘어서면서 결국 닫혔던 투표함이 다시 열렸다. 그 결과 이회창 후보는 88표가 늘어났고, 노무현 후보는 816표가 줄었다. 당락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후보별로 분류된 100장짜리 투표용지 묶음에서 단 한 표의 오차도 없는 것으로 나오면서 참관인들의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던 한나라당은 역풍을 맞았고, 수개표 당일 “재검표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신정부 출범에 협조하겠다”고 사과했다. 당시 대법원은 재검표 비용으로 한나라당에게 4억 8800만 원을 예납 받았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명분도, 돈도 잃은 셈이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