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의 최고 어른 격인 한국은행 총재가 채권시장 막내 격인 증권사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다. 한은이 금리정책을 펼칠 때는 어느 정도 시장이 예상할 수 있는 정보를 줘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이유다. 그런데 경기고-서울대가 낳은 ‘3대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던 김중수 총재가 시장의 뭇매를 자처한 데는 나름의 깊은 뜻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금융정책권을 쥔 한은은 금융시장 일선에서 금리를 사고파는 채권 전문가들에게는 갑(甲) 중의 갑으로 꼽힌다. 그들의 투자성과가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의 리결정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불만을 가질 수는 있지만, 내놓고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최근 삼성증권을 시작으로 신한금융투자 등 증권사들이 보고서를 통해 공개적으로 한은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삼성증권은 지난 7일 “한국은행이 현재 시장이 우려하는 것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으며 필요할 경우 행동에 나서겠다는 시그널이 필요하다”고 쏴붙였다. 9일 예상 밖의 금리인하 이후 나온 신한금융투자 보고서는 “기준금리 동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세웠던 최근 행보를 감안하면 한은은 정책 일관성을 잃었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이에 대해 일각에선 청와대와 정부는 물론 국회까지 금리인하를 요구한 상황이 김중수 총재의 ‘성동격서’ 행보를 부채질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익명의 채권시장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당시 경제수석을 지내는 등 김 총재는 지난 정부에서는 한은 독립성을 의심할 정도로 거의 정부 측과 한몸처럼 움직였는데, 이번 정부 들어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은 결국 자리를 지키기 위한 나름의 묘수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관계자는 “새 정부가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를 예고한 상황에서 내년 4월까지 임기를 채우기 위해서는 한은의 독립성에 기댈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의도적으로 청와대와 정부에 맞서면서 시장의 불만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결국 김 총재가 지난 4월부터 정부의 입장을 받아들여 금리를 내렸다면 ‘한은 독립성’이란 방패를 스스로 잃었겠지만, 추가경정예산이 국회를 통과한 5월에서야 금리를 내림으로써 방패를 유지한 채 남은 임기 동안, 그리고 퇴임 후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개선의 여지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온라인 경제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