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고맙습니다>의 한 장면. 사진제공=MBC
지난 2월 6일 밤 9시경 박 아무개 씨(51)는 부산진구 자신의 아파트로 귀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 주차장에 숨어있다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 2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들은 박 씨가 집 앞 복도에 이르렀을 때, 박 씨를 향해 돌진했다. 박 씨는 저항했지만 괴한들은 알루미늄 야구방망이 등으로 박 씨를 마구 구타하기 시작했다. 박 씨의 목숨이 위협받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박 씨의 비명을 들은 가족들이 집 밖으로 뛰어나왔고, 그를 공격하던 일행은 폭행을 멈추고 도주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했지만 박 씨는 다행히 전치 3주의 부상만 입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신고를 받은 부산 부산진경찰서는 수사에 들어갔다. 사건은 돈을 노린 단순 강도상해로 보였다. 그러나 현장에서 나온 야구방망이와 오토바이 등록증에 묻어있던 지문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지문의 주인이 불과 9일 전 박 씨를 차로 쳐 교통사고를 낸 렌터카 운전자 A 씨(28)였던 것이다.
경찰은 A 씨를 잡아들여 조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냈다. 사건은 단순 강도상해가 아닌 수백억 원대 오피스텔 분양권을 둘러싼 청부살인이었고, 박 씨의 살해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 3번째였다. 그리고 살인을 의뢰한 이는 다름 아닌 박 씨가 대주주로 있는 오피스텔 시행사의 대표이사 김 아무개 씨(48)였다.
김 씨는 B 오피스텔 시행사의 대표이사였지만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이른바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박 씨가 최대주주로 지분의 60%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총 분양가 340억 원에 이르는 부산 해운대구 우동의 한 오피스텔 분양권과 관련해 박 씨와 갈등이 생기자, 이를 독차지하기 위해 분양대행업자 전 아무개 씨(39)와 함께 박 씨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김 씨는 지인을 통해 평소 조폭과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조 아무개 씨(28)를 만나 총 1억 5000만 원을 주기로 하고 박 씨의 청부살인을 지시했다.
조 씨는 살인을 계획하면서 운전을 잘하는 손 아무개 씨(44) 등 2명에게 5000만 원을 주기로 하고 청부살인을 하청했다. 1월 4일 차량을 렌트한 그들은 퇴근하는 박 씨의 외제승용차를 미행했다. 뒤를 밟으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그들은 밤 10시경 부산진구 부암동의 한 대형마트 앞 도로에서 박 씨의 차량 운전석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충돌 직전 겁이 난 손 씨가 가속페달 대신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박 씨는 아무런 상해를 입지 않았고, 차량의 운전석 문짝만 찌그러지는 단순 접촉사고로 기록됐다. 그렇게 첫 번째 살해계획은 1100만 원의 재산피해만 내고 수포로 돌아갔다.
조 씨는 다음 계획을 위해 이번엔 교도소 동기인 A 씨(28) 등 3명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1월 28일 다시 차량을 렌트해 해운대구 우동의 박 씨의 회사 앞을 돌며 박 씨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밤 8시경 박 씨가 사무실을 나와 도로를 건너는 모습을 본 A 씨는 박 씨를 향해 질주해 차량 앞 범퍼로 들이받았다. 충격에 박 씨는 공중으로 튀어 올라 범행차량 앞 유리에 머리를 부딪친 후 길거리에 나뒹굴었다. A 씨는 범행 후 고의적인 사고란 걸 숨기기 위해 119구조대에 직접 신고까지 했다. 모든 범행이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병원에 이송된 박 씨는 죽지 않았다. 전치 2주의 상처를 입는 데 그쳤고, 심지어 2시간여 만에 병원을 나와 다음날 회사 회의를 주재하기까지 했다.
차량을 이용한 살해 계획이 두 차례나 실패하자 조 씨와 A 씨 등은 확실하게 박 씨의 목숨을 끊기 위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난 2월 6일 야구방망이를 들고 박 씨의 아파트로 직접 찾아가 그를 구타하는 범행을 실행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박 씨는 어떻게 달려오는 차에 치이고, 야구방망이로 구타를 당하면서도 목숨을 건지고 전치 2~3주의 간단한 상해만 입을 수 있었을까. 경찰과 병원 관계자들은 “운이 좋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관계자는 “박 씨가 과거 운동을 해서 몸이 좋긴 하다. 하지만 차량의 파손 상태나 아파트 CCTV의 폭행 장면을 보면 다른 사람의 경우 그 정도 상해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천운이 따랐다”라고 설명했다.
세 차례의 범행을 실행했다 실패한 조 씨 역시 경찰 조사에서 “박 씨는 터미네이터였다”라며 혀를 내두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오피스텔 시행사의 명의상 대표일 뿐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김 씨가 박 씨 몰래 은행대출 8억여 원을 받은 점 등을 미뤄 오피스텔 분양 이권을 가로챌 목적으로 박 씨를 상대로 청부살인을 시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김 씨는 이러한 혐의에 대해 “박 씨와 미분양 오피스텔 처리 문제로 갈등을 빚어와 분양을 내 뜻대로 마칠 때까지만 병원 신세를 지게 할 생각으로 청부폭력을 행사했다”며 살해할 목적은 없었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용의자들의 통화 내용을 보면 ‘확실히 보낼 수 있나’, ‘진짜 끝낼까요’ 등의 대화가 오갔고, 단순 폭력교사에 1억 원이 넘는 돈을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전했다.
한편 부산진경찰서는 지난 24일 대주주 박 씨에 대한 청부살인을 의뢰한 혐의(살인교사)로 오피스텔 시행사 대표이사 김 씨를 구속하고, 공범인 법무사 사무장 전 씨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또한 김 씨의 의뢰를 받고 박 씨를 살해하려한 청부업자 조 씨 등 3명을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하고, 이에 동참한 5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