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선수재 등 혐의로 구속수감됐던 김대중 전 대 통령의 둘째아들 홍업씨가 지난 9일 형집행정지 로 풀려났다. 사진은 지난해 6월 구속되는 홍업 씨(왼쪽). | ||
“대통령 아들도 복역 중 병을 앓으면 법 절차에 따라 치료 받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니냐.”
지난해 7월 알선수재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53)가 최근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것을 두고 뒷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일반 재소자들이라면 엄두를 내기 어려운 ‘특혜’를 받은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홍업씨는 한가위 연휴 하루 전인 지난 9일 ‘조용히’ 석방됐다. 검찰은 연휴가 끝나서야 뒤늦게 소식을 듣고 취재에 나선 기자들에게 “홍업씨가 심한 우울증과 고혈압 등 합병증으로 수감생활을 견디기 어렵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주거지를 병원과 집으로 제한하는 조건으로 3개월 동안 형집행정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물론 홍업씨가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다. 검찰은 “3개월 뒤 병세가 호전되면 재수감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검찰 안팎에서는 홍업씨가 재수감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동안 지병을 이유로 일시 석방된 정치인 등 고위층 인사들이 나중에 병세 호전을 이유로 재수감된 전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형집행정지는 징역·금고 또는 구류의 선고를 받은 자가 심신장애로 의사능력이 없는 상태에 있는 때, 형을 선고한 법원에 대응한 검찰청 검사 또는 형의 선고를 받은 자의 현재지를 관할하는 검찰청 검사의 지휘에 의하여 심신장애가 회복될 때까지 형의 집행을 정지하는 것이다. 또 형의 집행으로 인하여 현저히 건강을 해하거나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을 염려가 있는 때, 또는 기타 중대한 사유가 있는 때에도 형의 집행을 정지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효력을 지닌 가석방의 경우, 형기의 3분의 1 이상을 복역해야 심사 대상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형집행정지와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홍업씨는 과연 ‘현저히 건강을 해하거나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을 염려’가 있을 정도로 병세가 중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검찰측 설명은 “병원 전문의의 소견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다.그러나 홍업씨가 생활했던 서울구치소 직원들의 주장은 좀 다르다. 한 교도관은 “증상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홍업씨가) 접견 다 다니고 괜찮았다”고 말했다. 그다지 병세가 중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 한보 및 진승현 게이트 사건에서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난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각각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던홍인길 전 의원, 장학로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왼쪽부터). | ||
홍업씨가 입원했던 병실은 ‘최규선 게이트’의 주인공인 최규선씨가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 녹내장 수술을 받고 잠시 입원했던 방으로, 하루 입원비가 50만원 안팎인 특실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 전까지 부담한 병실료만 8천만원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홍업씨의 병원 생활을 둘러싸고 구치소 직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 교도관은 “교도관 10명이 한 번에 2명씩 주야로 돌아가며 홍업씨 병실을 지켰는데 이들은 교도소 보안 및 숙직업무에서 제외됐다. 이 때문에 전체 숙직 인원에서 10명이 줄어들어 나머지 직원들이 이를 대신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고생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고위층이라고 너무 대우를 해주는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말대로 ‘힘깨나 쓰는 사람들’ 치고 구속된 뒤 속칭 ‘에프엠대로’ 수형생활을 한 사례를 찾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최근 현대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돼 세 번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만 봐도 그렇다. 권씨는 97년 2월 한보사건으로 구속됐다가 같은 해 10월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고, 2002년 5월 ‘진승현 게이트’ 연루 혐의로 구속됐다가 같은 해 8월 다시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았다. 또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는 2002년 3월 세풍그룹으로부터 뒷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으나, 같은 해 6월 구속집행정지로 나왔다.
홍인길 전 의원과 이원조 전 은행감독원장, 장학로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 엄삼탁 전 병무청장, 김선홍 전 기아그룹 회장,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동생인 전경환씨 등도 형집행정지 제도의 수혜자들이다. 당연히 이들이 구속 및 형집행정지를 신청하는 사유는 거의 예외없이 당뇨, 고혈압 등의 ‘지병’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단 풀려나면 머지 않아 사면복권되고, 다시 정치무대 등에 복귀하는데 ‘지병’ 때문에 활동을 못한다는 얘기는 듣기 어렵다는 것이다.
▲ 김현철씨(왼쪽), 박지만씨. | ||
조금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는 마약투약 혐의로 수차례 교도소를 들락날락했지만 제대로 수감생활을 한 적이 없다. 이에 비해 일반 재소자들이 구속 및 형집행정지를 받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일례로 지난 2001년 9월 결혼식을 불과 1주일 앞두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김아무개씨의 경우 “결혼식만 올리게 해달라”며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식장에는 신부만이 입장한 상태에서 결혼식이 치러졌다고 한다.
지난해 7월에는 정신질환 등을 앓던 청송교도소 재소자 육아무개씨가 국가인권위원회의 도움 덕분에 일시적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을 수 있었다. 육씨의 가족들이 인권위에 “교도소 쪽이 수차례 육씨의 호소를 외면한 채 치료를 제대로 해주지 않고 있다”고 진정을 한 데 따른 것이다. 이런 ‘사법 불평등’과 관련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구속집행정지 등을 통해 형 확정 때까지 불구속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 대상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공평한 법 적용을 요구해왔다.
이와 함께 시민·사회단체들은 ▲교도소 내 의료서비스 수준을 높여, 질병에 따른 구속 및 형집행정지 대상자는 법 규정대로 심신장애로 의사능력이 없거나 생명에 위협받을 정도로 중한 환자로 국한할 것 ▲권력형 비리사범들에 대한 대통령의 사면권을 엄격히 제한할 것 등을 주장하고 있다.
구속 및 형집행정지 등의 최종 결재권을 갖고 있는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앞으로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주목된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