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숟가락 꽂을 일만… 이혼으로 그간 쌓아올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던 이재용 전무는 최근 숨 가쁜 해외 일정을 소화하며 실적 쌓기에 나서고 있다. | ||
지난 5월 29일 ‘삼성재판’ 상고심에서 이건희 전 회장은 에버랜드 편법증여 의혹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지난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으로 이재용 전무가 에버랜드 지분율을 25.10%까지 높이는 과정에 대해 헐값인수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대법원이 합법성을 공인해줬다. 이로써 이 전무는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그룹 지배구조 장악을 바탕으로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법적 하자가 없게 됐다.
당초 삼성재판 선고일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과 겹쳐 연기설이 나돌았지만 법원은 예정대로 판결을 진행했다. 재판에 관여한 11명의 대법관들 중 5명이 유죄 의견을 냈을 정도로 찬반대립이 팽팽했던 이번 판결은 결국 삼성 측에 유리하게 나왔다. 삼성 측은 재판 결과에 대체로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지만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던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혐의가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재배당 받게 된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1999년 이 전 회장 등 경영진이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저가로 발행해 이재용 전무 등이 이를 헐값에 사들이면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는지를 다시 판단하게 된다. 만약 손해액이 50억 원이 넘으면 형법상 공소시효 10년이 적용돼 처벌이 가능하지만 50억 원 이하일 경우 공소시효가 7년으로 줄어 이 전 회장 등은 처벌을 면할 수 있게 된다.
삼성 측은 삼성SDS 파기환송심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법조계에선 대체적으로 “쟁점사항이었던 에버랜드 건이 무죄판결 난 만큼 SDS 건도 삼성 측에 큰 타격을 주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 전무는 에버랜드 사건 무죄판결에 앞서 삼성특검 수사기간 중 ‘부실경영으로 계열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이른바 ‘e삼성 사건’에 대해서도 무혐의 처분을 받은 상태다. 이 전무 승계를 발목 잡아온 사안들이 대부분 해결된 만큼 이젠 ‘대관식’ 절차만 남았다고 볼 수도 있다.
▲ 이서현 | ||
이재용 전무는 올 초 이혼소송에 이은 협의이혼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면서 부침을 겪었다. 그럼에도 어느 때보다 숨 가쁜 해외일정을 소화해 실적 쌓기를 통한 승계명분 축적에 들어갔지만 아직 이 전무를 국내 1위 재벌 삼성의 간판으로 인정하는 시선이 충분해 보이진 않는다.
이 전 회장의 회장직 등극 시기와 이 전무의 현재 나이를 비교하는 시선도 있다. 지난 1987년 고 이병철 창업회장이 타계하면서 그룹 2대 총수직에 오른 이건희 전 회장의 당시 나이는 45세. 이 전무는 현재 41세다. 이 전 회장은 지난해 사원증까지 반납하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아직도 그룹 내 이 전 회장의 영향력은 여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따금 불거지는 건강이상설이 변수가 되겠지만 이 전 회장의 그룹 내 리더십이 건재한 만큼, 이 전무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회장이 아닌 ‘여론이 지지하는’ 국내 최고재벌 CEO 이미지를 만들어가기 위한 시간을 가질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 안팎에선 이 전무로의 안정적 승계기반을 다지기 위해 최근 ‘그룹 내 입지 강화’ 소문이 무성한 이 전 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와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의 ‘계열분리’를 선행과제로 보고 있다. 이부진 전무와 이서현 상무는 각각 8.37%씩의 에버랜드 지분을 갖고 있다. 이재용 전무의 25.10%엔 못 미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율이다.
▲ 이부진 | ||
이부진 전무의 분가 가능성은 그가 지난 2007년 삼성석유화학 지분 33.19%(131만 6156주)를 인수해 최대주주에 올랐을 때부터 제기됐다. 비상장 알짜 계열사인 삼성석유화학을 상장시켜 그 이익으로 이부진 전무가 호텔신라 주식을 사들일 가능성이 거론된 것이다. 이부진 전무는 현재 호텔신라 지분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호텔신라와 에버랜드가 사업 연계를 하는 점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지난 3월 유가증권시장본부는 호텔신라에 대해 ‘에버랜드 외식사업부 흡수 검토설 관련 조회공시’를 요구했다. 이에 호텔신라는 ‘에버랜드와 식음료 서비스 등의 사업 부문에서 시너지를 제고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나 통합 논의는 진행된 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재계 일각에선 이부진 전무가 지닌 지분만큼의 에버랜드 사업부문을 따로 들고 나가 독립의 길을 걷는 전초단계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최근 쏟아지는 이부진 전무-에버랜드 관련 소문들은 ‘종합선물세트’를 방불케 한다. “에버랜드에 온 이부진 전무 측근이 핵심보직을 맡아 경영 최일선에 나섰다” “이부진 전무가 에버랜드에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에버랜드 내에 이부진 전무용 사장급 사무실이 들어섰다” “그룹 내 이재용-이부진 남매에 대한 줄서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등등. 갖가지 이야기들이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 퍼져나가는 중이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에버랜드 식음료 서비스 부문이 너무 약해져서 이 부문 강자인 호텔신라와 사업연계를 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이부진 전무가 에버랜드에 드나들면서 도움을 주게 된 것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또한 “에버랜드 내 별도 사무실 마련이나 줄서기 관련 소문은 모두 낭설”이라고 밝혔다.
한편 삼성 주변에선 계열분리 방안 조기발표를 통해 혹시나 있을 이재용-이부진 남매에 대한 줄서기 경쟁을 피하고 사업 재분배에 따른 인력 구조조정까지 꾀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 역시 이부진 전무와 마찬가지로 에버랜드 지분 8.37%를 갖고 있으며 제일모직도 에버랜드 지분을 4% 보유하고 있어 제일모직 소그룹군의 독립 가능성이 거론돼 왔다. 이렇게 분가를 위한 총수일가 내 지분정리나 사업 분할은 이건희 회장의 의중을 빼놓고 거론할 수 없는 사안. 그래서 ‘이 전 회장의 복귀론’에 더 무게를 두는 시선도 있다(‘이건희 복귀론’앞과 뒤
기사 참조).
에버랜드 판결 이전부터 이재용 전무는 그룹 계열사 주요 사안을 보고받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올 초 정기인사에서 ‘이재용 사람들’이 대거 전진 배치되면서 삼성그룹이 이재용 체제로 급속 재편 중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재용 전무는 현재 ‘삼성그룹 회장’이라는 고지가 뚜렷하게 보이는 8부 능선을 넘은 셈이다. 그가 무탈하게 고지에 올라 화려하게 ‘대관식’을 치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