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사장 | ||
문제는 경영권 승계다.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의 순환출자구조를 이루는 세 개 회사 중 정의선 사장이 보유한 ‘의미 있는’ 지분은 기아차 1.87%가 고작이다. 정 사장이 보유한 현대차 주식은 6445주로 지분율 0.01%에도 미치지 못한다. 7만 원 선인 현대차나 10만 원대인 현대모비스의 지분을 사들이는 것보다는 1만 2000원 선인 기아차 지분 매집이 정 사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 셈이다.
계열사 물량 지원 속에 글로비스 주가가 지난 3년여 동안 두 배 정도 뛰어오르면서 정 사장이 글로비스 지분을 통해 기아차 지분을 얼마나 사들일 수 있을지도 주목받아왔다. 정 사장이 보유한 글로비스 주식 1195만 4460주(31.88%)의 시가총액은 약 9564억 원. 기아차 주가를 6월 17일 종가 1만 2500원 기준으로 놓고 단순 환산하면 정 사장은 글로비스 지분 매각대금으로 기아차 주식 약 7650만 주를 살 수 있다.
이는 기아차 지분율 약 21%에 해당한다. 지분 매매 과정에서 소요될 엄청난 세금을 감안해도 정 사장은 현재 보유 중인 기아차 지분 1.87%를 포함해 적어도 10%대의 지분율은 확보할 수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이 경우 알짜 계열사인 글로비스 지배력에 문제가 생긴다. 정몽구-정의선 부자 외에 다른 현대차 계열사의 글로비스 지분 보유량이 없어 정 회장의 지분을 사회에 환원하고, 정 사장의 지분을 현금화하면 글로비스는 ‘남의 회사’가 된다. 글로비스를 실탄창고 삼아 정 회장의 사재 출연과 정 사장의 글로비스 지분 전량 매각을 동시에 하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한 셈이다.
글로비스 지분을 활용한 주력 계열사 지분 매입이 당장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선 사장의 조기 경영권 승계 관측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1938년생인 정몽구 회장이 고령에 접어들고 있으며 최근 벌어진 계열사 간 합병 추진이나 임원 인사 등이 정 사장 승계구도와 묘하게 얽혀 있어 ‘대관식이 임박했다’는 전망을 부추기는 것이다.
현대모비스에 흡수 합병될 현대오토넷의 최대주주는 현대차(지분율 16.77%)이며 그 뒤를 기아차(8.91%) 글로비스(6.73%)가 잇고 있다. 합병작업이 완료되면 정의선 사장이 최대주주(31.88%)인 글로비스가 그룹 지배구조 핵심축인 현대모비스의 대주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데 현재 제시돼 있는 모비스-오토넷 합병비율에 따르면 글로비스가 차지할 현대모비스 지분율이 1%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여 정 사장의 지배구조 장악에 결정적 보탬이 되진 않을 전망이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일종의 ‘주식 스와핑’이 활용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 사장이 보유한 글로비스-기아차 주식을 맞교환하면 기아차가 글로비스 지분을 보유하게 돼 정 회장이 지분을 내놓아도 글로비스 지배력을 잃지 않는 동시에 정 사장도 기아차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계열사 지배력 유지와 총수 일가 사재 출연, 그리고 황태자의 승계용 지분 확보 등 ‘일석삼조’가 가능한 셈이다. 글로비스가 기아차 지분을 대량 매집해 ‘정의선→글로비스→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 형태의 지배구조 형성도 가능하다. 그러나 위 두 가지 경우 그룹 물량으로 성장한 글로비스를 정 사장의 기아차 지분율 강화에 활용하는 데 대한 비판여론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다른 쪽에선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지배구조 핵심을 이루는 계열사 중 한 곳과 글로비스의 합병을 문제 해결 방안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합병법인에서의 정 사장 지분율을 통해 순환출자로 이뤄진 그룹 지배구조를 장악할 수 있다는 관측에서다. 그러나 황태자의 경영권 승계 외에 다른 명분을 찾아보기 힘든 ‘제조업 계열사-물류 계열사 합병’ 추진은 비판여론에 직면할 것이 자명한 터라 그룹에서 이 방안을 고려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글로비스를 활용한 정 사장의 경영권 승계가 당장 쉽지 않다고 보는 재계 관계자들은 비상장 건설 계열사 엠코로 시선을 돌려본다. 엠코의 최대주주는 지분율 25.06%의 정의선 사장이며 글로비스가 24.96% 지분을 가진 2대주주에 올라 있다. 엠코는 글로비스와 마찬가지로 그룹 물량을 발판 삼아 성장 중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엠코의 총 매출액에서 현대차, 현대제철과의 거래액이 각각 10.7%, 38.6%를 차지한다.
만약 계열사 물량을 통해 엠코가 회사가치를 키워 상장할 경우 이 회사 최대주주인 정 사장은 물론 글로비스까지 막대한 상장차익을 얻을 수 있다. ‘총수 일가가 대주주로 있는 비상장 계열사에 대한 그룹 물량 지원으로 회사 가치를 키워 상장시킨 뒤 그 차익으로 지주사나 주력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재벌가 관행을 정몽구-정의선 부자가 답습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