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지검 고양지청 형사2부(김성은 부장검사)는 금품수수 혐의(배임수재)로 KT 전·현직 임직원 147명과 이들에게 뒷돈을 건넨 협력업체 인사들 34명을 포함해 총 178명을 적발, 7명을 구속 기소하고 47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지난 7일 밝혔다. 검찰은 중국으로 달아난 협력업체 대표 1명을 수배하고 금품수수 액수가 경미한 KT 직원 123명에 대해선 회사 측에 자체징계하도록 통보했다.
검찰은 이번 수사를 통해 그동안 소문이 파다했던 KT의 고질적인 공사발주 관련 비리를 엄단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인사청탁 대가로 8000만 원을 상납받은 본부장급(상무) 인사, KT 퇴직 후 협력사에 유령직원으로 적을 두면서 2년간 임금 명목으로 매달 300만 원씩 7200만 원을 수수한 중간간부, 그리고 KT 공사발주 관련 금품수수 비리를 빌미로 KT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그 진정 취소를 대가로 비리 임직원들로부터 9500만 원을 갈취한 하도급업자 등 유형도 다양하다.
이번에 적발된 KT 임직원들은 공사 수의계약의 경우 발주액의 5~10%를 하도급 업체로부터 관행적으로 받아 챙겼다고 한다. 뒷돈을 받은 직원들은 임원급에서 말단 대리까지 다양한 직급에 걸쳐있다. 이번 검찰수사를 통해 기소된 인원은 총 54명. 그 중 본부장 2명(상무). 건설국장 3명(상무대우), 지사장 3명(상무대우)으로 임원급만 총 8명에 이른다. 50대 이상 부장급도 기소자 명부에 여럿 이름을 올렸다. 조직 내에서 잔뼈가 굵은 인사들이 대거 붙잡혀 들어간 KT로선 간부급에 대한 대규모 인적 쇄신이 불가피해진 셈이다.
검찰의 수사발표에 앞서 KT는 대대적인 내부 감사 작업을 벌여왔다. 얼마 전엔 임직원들에게 비리 자진신고를 공개 요구하기도 했다. 지난해까지 협력업체들의 상납 관행이나 영수증 조작을 통한 공금 착복 등의 소문은 파다했지만 적발 사례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관료주의적 인맥문화가 깊이 박혀온 만큼 비리 임직원에 대한 제보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풍토였다.
그러나 올 초 영입된 서울고검 검사 출신 정성복 윤리위원장(사장)을 필두로 수도권 서부본부 등의 감사를 통해 30여 명의 임직원이 적발됐고 그 중 4명이 검찰에 고발조치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설마’ 했던 직원들도 회사 측의 단호한 척결에 혀를 내둘렀다는 이야기마저 들려왔다.
검찰은 지난 7일 KT 임직원 비리 수사 발표 당시 “지난 3월 KT 수도권서부본부 서부망건설국에서 공사 발주 관련 금품수수 비리가 만연돼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베테랑 검사 출신 윤리위원장을 앞세운 KT의 내부 감사와 검찰 고발조치가 검찰의 대대적인 비리 혐의 적발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이번 수사는 KT에 도덕 불감증이란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붙였지만 사내 지지 기반이 허약했던 이석채 회장은 취임 6개월 만에 ‘비리 척결’이란 명분을 쥐고 리더십 극대화를 도모할 기회를 잡게 됐다. 이 회장은 취임 당시부터 조직 장악력 한계에 대한 숙제를 안고 있었다. 이 회장은 지난해 남중수 전 사장 구속 이후 KT의 새 CEO 후보 물망에 오르면서부터 ‘외풍’ 논란을 달고 다녔다. 현 정부 세력과의 교감설은 물론 KT 출신이 아니란 점 때문에 조직 내부에서조차 ‘낙하산’으로 불릴 정도였다.
▲ 9일 분당 본사에서 KT블루보드(청년중역회)의 멤버들이 역발상경영, 미래경영, 소통경영, 고객감동경영을 지향하는 새로운 경영방향 ‘올레(Olleh)’를 외치고 있다. | ||
이렇다 보니 이 회장 취임 직후 추진된 내부사정 움직임이 ‘기존 인맥 흔들기’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통해 이 회장은 조직 개혁을 위한 사정 칼날을 휘두를 수 있는 명분을 쥐게 돼 KT의 조직 문화를 뒤바꿀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이번에 검찰에서 ‘혐의가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이유로 123명에 대한 처분을 KT 측에 일임한 점 역시 이석채 회장에겐 조직 장악을 위한 더 없이 좋은 카드가 될 듯하다. 이들에 대한 비리 관련 정황과 진술 확보로 이석채 체제에 대한 조직의 충성경쟁을 유발시킬 수 있는 까닭에서다. KT 안팎에선 적지 않은 인원이 조만간 감사를 통해 옷을 벗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 회장의 이 같은 개혁이 또 다른 관료주의적 문화를 낳을 가능성을조심스레 제기한다. 사법처리 대상에선 벗어났지만 내부감사의 칼날을 언제든 맞을 수 있는 인사들 사이에 ‘줄서기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항간에는 KT의 몇몇 인사들이 정치권에 줄을 대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민영화됐다고는 하나 KT는 여전히 공기업 색채를 지녔고 외풍 논란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자연스레 권력층과 직·간접 관계를 맺어온 전·현직 인사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석채 체제하에서 신규 영입된 인사들의 정치 이력 역시 새로운 줄서기 경쟁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지난 1월 14일 이석채 회장이 새 CEO로 취임한 이후 KT는 현 정부와 돈독한 관계의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던 경력의 석호익 부회장,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에 몸담았던 서종렬 미디어본부장(전무), 이명박 대선캠프에서 모바일팀장을 맡았던 김규성 KT엠하우스 사장 등 현 정부와 가까운 인사들은 모두 이석채 체제 출범 이후 영입된 인사들이다.
순혈주의가 뿌리 내려온 KT에 낙하산이란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입성한 이석채 회장은 어느덧 취임 6개월째를 맞고 있다. 이 회장의 개혁 드라이브가 어떤 성과를 거두느냐에 따라 그를 따라 다녀온 낙하산 꼬리표의 수명도 결정될 듯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