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NLL 대화록’ 공개에 대해 민주당이 ‘국정원 국정조사’로 맞불을 놓는 등 정치권이 극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 만남.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화록을 본 서상기 정보위원장을 비롯한 새누리당 의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확인됐다”며 대화록 전문 공개를 주장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국정원이 선거 및 정치 개입 의혹을 물타기 하기 위해 지난해 대선 때도 공개하지 않았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다”며 남재준 국정원장 탄핵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초대형 이슈였지만 이 수석의 표정이나 반응은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NLL, 참 오래도 간다. 이렇게 오래 가니까 그(노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때 했다는) 이야기가 뭔지 궁금해진다”는 반응으로 말문을 연 이 수석은 시종일관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는 청와대와 무관한 일이며, 이를 둘러싼 논란 역시 정치를 하는 국회가 알아서 잘 정리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기자들이 국정원 대화록 발췌본을 공개하기 전 청와대와 상의했는지를 묻자 이 수석은 “그것이 청와대가 허락할 일이냐. 청와대가 허락하고 안 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면서 “국정원 내에도 법률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검토도 했을 것이고, 문제가 없다고 해서 공개한 것일 테고, 그것에 대한 책임은 검토한 쪽에서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정원이 공개했다는 대화록 내용에 대해서는 “저희는 그것을 못 봤다. 저희가 판단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발을 뺐다.
이 수석은 대화록 전문 공개 논란에 대해 “그러한 부분들이 법적으로 가능한지 검토해서 알아서 할 일”이라며 국정원으로 공을 넘겼다. 청와대가 책임을 지고 국정원 선거·정치 개입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민주당 주장에 대해서는 “정치의 중심이 엄연히 국회인데 자꾸 청와대에 뭘 해결하라, 결단하라는 식으로 하면 결과적으로 국회 스스로 작아질 수밖에 없다”며 “정치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정치권에서 해결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일축했다.
왼쪽부터 원세훈 전 국정원장, 남재준 국정원장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와 ‘판도라의 상자’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는 어떤 무시무시한 게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그 무시무시한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엄청난 재앙과 혼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역시 앞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상하기 어렵고, 당연히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 예측하는 게 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번 대화록 공개가 박 대통령과 여권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민주당은 최근 지난 대선 당시 국정원의 선거·정치 개입 과정에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인 권영세 주중 대사가 관련됐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청와대와 국정원의 커넥션 의혹은 이번 대화록 공개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나가게 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 이번 대화록 공개를 통해 과거 진보 정권의 무원칙한 대북정책의 민낯이 까발려지게 됐다는 점도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과 여권에 호재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한 여권 인사는 “박 대통령의 지지율을 끌어올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원칙 있는 대북정책”이라며 “박 대통령의 대북 접근법을 지지하는 국민들에게 노 전 대통령의 굴욕적인 발언들은 큰 충격과 실망으로 다가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반대 주장도 만만찮다. 한 정치평론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했다 치자. 쏘 왔(So, What)? 이미 사망한 노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울 수 있나? 지난해 대선 국면에서 대화록이 공개됐다면 엄청난 파괴력을 가졌겠지만, 박근혜 정부가 본궤도에 오른 이때에 과거지사가 무슨 소용 있겠느냐”며 “이번 대화록 공개는 장기적으로 박 대통령과 여권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서울대 총학생회가 20일 대검찰청 앞에서 국정원 사건 관련 성명서를 발표했다. 잇따르는 시국선언에 위기감을 느낀 여권이 ‘대화록 공개’라는 무리수를 둔 것 아니냐는 시각도 나온다. 임준선 기자 kjilm@ilyo.co.kr
7, 8월은 임시국회가 의무적으로 열리는 달이 아닌 데다, 여야가 격하게 충돌할 경우 각종 법안 처리는 9월 정기국회 이후로 밀릴 수밖에 없다. 정기국회가 열린다 해도 국정감사, 내년도 예산안 심사 등 갈등 요인만 더 추가된다. 더욱이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다수 여당이 과거와 같은 날치기 입법에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여권 내에서조차 “취임 첫 해에 아무런 성과도 못 내고 가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표출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 논란이 이명박 정부를 넘어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게 됐다는 점도 여권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국정원 선거·정치개입 의혹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전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선을 그어왔다. 하지만 대화록 공개는 엄연히 박 대통령이 임명한 남재준 원장 체제의 국정원이 결정한 사안이다. 야당으로서는 이제 전 정권이든 현 정권이든 가릴 필요가 없게 된 셈이다.
향후 남북대화는 물론 외국과의 협상 등에 미칠 악영향 역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정부에서 일했던 한 정치권 인사는 “상대가 북한이든 미국이든 외교와 협상의 과정에서는 공개할 수 없는 대화들이 많이 오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정상회담 대화록 등을 비밀로 정해 30년 이상 공개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며 “국정원이 금도를 어겼기 때문에 앞으로 박근혜 정부가 남북대화를 할 때에도 ‘대화록이 다 공개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이 박근혜 정부의 발등을 찍은 셈”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처럼 ‘양날의 칼’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이정현 수석의 설명처럼 청와대와 무관하게 이뤄진 것일까. 현재로선 그의 말을 반박할 근거가 뚜렷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른바 ‘촛불 트라우마’가 전례 없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라는 여권의 과잉대응을 불러온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제기된다. 국정원의 선거·정치 개입 의혹에 대해 서울대 총학생회와 야권 성향 단체들이 잇따라 시국선언에 나서는 모습을 보며 여권 인사들이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의 ‘촛불 사태’를 떠올린 것 아니냐는 것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최근 잇단 시국선언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여 왔던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아직까지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정국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