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의 또 다른 한 막이 모두 종료됐다. 국가대표팀 최강희호와 함께 했던 1년 6개월여 짧고도 긴 여정은 2014브라질월드컵 본선 티켓 쟁취와 함께 막을 내렸다. 출발은 화려했지만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아쉬움이 더 많았다. 기쁠 때보다 힘겹고 괴로운 시간이 훨씬 길었다. 어려운 중동 원정길에서의 2% 부족함으로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상황. 개운치 못한 상황 속에 최 감독은 대표팀 사령탑 부임 초기 공언한 대로 K리그 클래식(1부 리그)의 원 소속 팀 전북 현대로 되돌아간다. 최강희호 체제가 남긴 발자취를 ‘빛과 그림자’를 주제로 살펴봤다.
지난 18일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 예선 한국과 이란의 경기에서 최강희 감독이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차피 대표팀 감독이란 잘해도, 못해도 욕을 먹는 위치다. 워낙 주목하는 시선들이 많다보니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사실 스포츠 사령탑들 가운데 대표팀 감독은 개인 시간이 많은 자리다. 최 감독 본인도 “시간이 너무 넘쳐난다. 간헐적으로 사나흘 정도 소집해 훈련한 뒤 A매치를 치르고 주말마다 K리그 경기장이나 해외 출장을 떠나 선수 몸 상태를 점검하는 것 정도를 빼면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라고 푸념할 정도였다. 그러나 대표팀 감독이 받는 중압감은 엄청나다. 조금만 기대치에 어긋나면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받는 연봉의 8할 이상은 ‘(주변의) 욕 값’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 감독의 경우, 뚝심의 보상이었다는 표현이 더 낫다. 아무리 주변에서 곱지 않은 평가를 쏟아내도 일단 자신이 옳다 싶은 건 끝까지 고수했다. 국내 무대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대거 기회를 제공한 것도 그의 역할이 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맞이한 2012년 2월 쿠웨이트와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최종전을 앞두고 최 감독은 국내파 멤버들을 중용했다. 이 선택은 주효했다. 자신이 현장 가까이에서 살펴보며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K리거들을 대거 투입시켜 원했던 결과(2-0 한국 승)를 냈다. 당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여러 축구인들은 “쿠웨이트전은 승부수였다.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내로라하던 유럽 리거들을 상당수 제외시키는 선택은 솔직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서도 우려의 뜻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최 감독은 끝까지 자신의 결정을 밀고 나갔다. 정말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이후에도 기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단순히 이름값에 의존해 태극마크를 다는 일은 적어도 최강희호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철저히 해당 시점(A매치 즈음)의 몸 상태가 선발의 기준이 됐다. 사상 첫 원정 16강 위업을 일군 2010남아공월드컵과 사상 첫 동메달 획득의 영예를 만든 2012 런던올림픽을 기점으로 소위 ‘언터처블’이 됐던 박주영(아스널)-기성용(스완지시티)-구자철(볼프스부르크) 등을 과감히 제외시켰고,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기량이 만개한 손흥민(함부르크SV)도 대표팀 엔트리에는 꾸준히 이름을 올렸지만 정작 선발 출전과 거리가 있었다.
당연히 비판은 늘 존재했다. 앞서 거론된 선수들은 그저 유럽 빅(Big) 리거란 이유만으로 일부 극성 여론으로부터 면죄부를 받기 일쑤였다. 이들이 왜 대표팀에서 빠져야 하는지, 또 중용될 수 없는지를 분석하기보단 그저 “제외시켰다”는 이유로 질타를 쏟아내기 바빴다.
전북의 전성기를 함께 일궈낸 베테랑 공격수 이동국(전북)만을 편애하느라 유럽 리거들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더불어 단조로운 전술 운용도 표적이 됐다. 장신 공격수 김신욱(울산)을 향한 포스트플레이. 소위 ‘뻥 축구’ 논란이었다. 그런데 할 말도 있다.
“우린 이겨야 했고 이기기 위한 경기를 해야 했다. 전술도 전술이지만 내용보다 결과에 치중해야 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최강자로 통한다. 우리를 만나면 항상 무게중심을 수비로 돌린 채 잠그는 데 치중한다. 어떤 게 효율적인 공략법인지 선택해야 했다.”
최 감독의 선택은 결과가 보여줬다. 물론 월드컵 본선은 또 다르다. 그 때까지는 또 준비할 시간이 남아있다.
최 감독은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고 K리거들에게 고루 기회를 제공했다. 최준필 기자
대표팀은 조광래 전임 감독 시절, 크게 젊어졌다. 남아공월드컵 후 세대교체가 본격화됐고 2011 카타르 아시안컵 때는 거의 정점을 찍는 듯했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 특유의 조급증이 발목을 잡았다. 소방수로 긴급 투입된 최 감독은 월드컵 예선만 하고 본선은 가지 않는 사상 초유의 ‘시한부 감독’으로 낙인찍혔고, 노장 선수들이 다시 대표팀에 하나둘씩 복귀하면서 세대교체도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나왔다.
하지만 모든 게 최 감독만의 잘못일까. 어쩌면 최 감독은 축구협회의 희생양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선수들은 모두 “노(No)”라고 해도 대표팀을 둘러싼 구단 관계자, 에이전트 등 축구계 외부에서 나오는 소문은 부정적인 내용이 훨씬 많았다. 대표적인 게 파벌 형성이다. 축구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표팀은 기본적으로 유럽파와 국내파로 이분화돼 있는데다 교집합 형태로 올림픽파도 있고 추가적으로 이 중 어느 축에도 끼어들지 못하는 제3지역(중동·일본) 멤버들이 있다”고 한다.
최 감독은 나름 이런 분열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김남일(인천) 등 고참들을 틈틈이 합류시켰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일부의 흐트러진 기강을 다잡는 데 끝내 실패했다. 몇몇 선수들은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해프닝을 벌이면서 대표팀 분위기를 흐렸고,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며 쉽게 넘보기 어려운 그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했다. 심지어 레바논 원정 직후 파주NFC로 돌아와 우즈베키스탄과 아시아 최종예선 7차전을 준비하면서 모 선수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고참 선수와 훈련 중 부딪혀 넘어지자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고 한다. 대표팀 내 기강이 얼마나 해이해졌는지 단적으로 드러낸 장면이었다. 정강이 부상으로 한참 대표팀을 이탈해있던 이청용(볼턴)이 3월 카타르와 홈경기를 앞두고 “대표팀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꼬집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했다.
한 중견 에이전트는 “현재 대표팀은 엄청난 경력을 쌓은 이가 아니라면 분위기를 되돌리기 어렵다. 박지성-이영표-설기현 등 과거 유럽파는 2002한일월드컵 4강 등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발판 삼아 해외로 나간 케이스가 많지만 지금 어린 선수들은 대표팀의 후광 속에 성장했다기보다 본인이 잘해 외국에 나간 이들이 대부분이다. 기본 사고방식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최강희호는 월드컵 본선행이라는 토끼는 잡았을지언정 미처 놓친 토끼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 임무는 차기 감독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돌아갔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잡음 없도록 절차 ‘착착’
홍명보 감독. 임준선 기자
이란과의 2014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8차전(0-1 한국 패)이 끝난 다음 날인 6월 19일 최 전 감독은 이날 오전 울산에서 축구협회 정몽규 회장을 직접 만나 앞서 공언한 대로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전했고, 축구협회는 즉각 기술위원회를 열고 홍 감독이 포함된 4명 후보 가운데 한 명에게 대표팀을 맡기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허정무 부회장 등 축구협회 고위 관계자들은 다른 후보들을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홍 감독이 가장 유력한 후보임은 틀림없다”고 못 박아 사실상 홍 감독이 차기 대표팀 사령탑에 내정됐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당장 발표하지는 못했다. 사연은 이랬다. 일련의 절차가 필요했다. 앞서 조광래 전 감독이 최 전 감독에게 대표팀 지휘봉을 물려주는 과정에서 별다른 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경질 통보를 받아 축구협회는 여론의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를 선행학습 삼아 축구협회는 정중동의 자세를 취해야 했고 전임자(최강희)의 사퇴 발표-기술위원회 개최 및 후보 압축-축구협회 수뇌부 결정-회장(정몽규)의 최종 재가 등의 절차를 밟는 게 좋다는 판단이 섰다. 이미 축구협회는 오래 전부터 새 감독을 물색해왔고, 직간접적인 접촉 결과 6월 초 홍 감독에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으로 알려진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