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지난주 캐리 그랜트와 랜돌프 스콧의 긴 세월에 걸친 ‘금지된 우정’ 혹은 ‘감춰진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의 관계가 공공연한 소문이었고 당사자들도 나름 당당한 태도를 취했다면, 록 허드슨의 케이스는 좀 더 은밀하고 비밀스러웠다. 1985년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며, 그때까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는 질병에 대한 인류적 경각심을 일깨웠던 록 허드슨은 한때 ‘동성애자=에이즈’라는 보수주의자들의 악의적인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진정한 고통은 자신의 정체성을 속이며 살아야 했던 삶이었다.
록 허드슨은 30년간 동성애 정체성을 숨기며 여성 관객들의 판타지적 존재로 살아야 했다.
록 허드슨이 데뷔한 후 명성을 얻게 되는 1940~5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는 건 ‘사회적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허드슨을 발탁한 헨리 윌슨도 게이였지만, 그도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있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욕망을 자신이 키우는 배우들에게 투영했고, 그는 록 허드슨이 게이라는 사실을 진작 눈치 채고 있었다.
사실 록 허드슨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몇몇 타블로이드 저널에서도 살짝 눈치를 채고 있는 상태였다. 에이전트인 헨리 윌슨은 긴장했다. 그의 고객 중 록 허드슨은 가장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윌슨은 일종의 ‘이성애자 코스프레’를 시작했고, 록 허드슨은 공적인 자리에서 종종 여배우들의 에스코트를 하며 등장했다. 그럼에도 결정적 단서를 들고 윌슨을 협박하는 기자들이 있었는데, 그럴 땐 딜을 했다. 자신에게 소속된 배우들 중 하나를 희생시켜 허드슨을 보호하는 방식이었다. 로리 캘하운이라는 배우의 청소년 시절 비행이 드러난 건, 그런 이유였다. 그 외에도 여러 배우들이 허드슨을 위해 희생되었다.
록 허드슨과 아내 필리스 게이츠. 가운데는 에이전트 헨리 윌슨.
1954년 제인 와이먼과 공연한 <거대한 강박관념>이 흥행하면서 본격적인 스타덤에 오른 록 허드슨은 <자이언트>(1956)로 급상승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조금씩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했다. 왜 서른 살이 넘은 이 멋진 남자는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에이전트인 헨리 윌슨은 결심한다. 록 허드슨을 결혼시키기로. 그 상대는 윌슨의 비서인, 전직 스튜어디스였던 필리스 게이츠였다. 허드슨이 게이였는지에 대해 그녀가 결혼 당시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윌슨의 계획에 의해 ‘연인’으로서 <자이언트> 현장을 종종 방문했고, 1955년 11월엔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다. 윌슨은 기자들에게 “두 사람이 눈이 맞아서 아무 얘기 없이 사라졌다”는 기사를 흘렸고, 곧 결혼했다.
하지만 날조된 결혼 생활이 행복할 리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허드슨도 한때 필리스 게이츠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꼈다고 하지만, 그 감정이 오래 갈 리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1958년에 이혼했다. 이후 록 허드슨은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리며 헨리 윌슨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1960년대에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쩌면 록 허드슨은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엔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게이 중년남 파티 같은 것이 열리곤 했는데, 허드슨은 그곳에서 당시 TV 엔터테이너였던 짐 나보르와 게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공개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 허드슨과 나보르가 지속적인 관계를 맺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결혼설까지 돈 짐 나보르(왼쪽 사진 오른쪽)와 마지막 연인 마크 크리스천과 함께 찍은 모습.
1982년에 록 허드슨은 29세의 마크 크리스천을 만나 연인이 된다(그는 바이섹슈얼리티였다). 그리고 (뮤지컬 <라 카지>의 원작인) 연극 <새장 속의 광대(La Cage Aux Folles)>에 출연할 계획도 세웠다. 결국 무산되긴 했지만 만약 출연했다면 록 허드슨이 처음으로 게이 역할을 맡았을 작품이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점점 수척해져가던 그는 1984년 6월에 자신이 HIV 보균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85년, 과거 로맨틱 코미디의 단짝이었던 도리스 데이는 TV 토크쇼를 시작하며 록 허드슨에게 첫 게스트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허드슨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친구의 부탁에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냈고, 몰라보게 마르고 늙어버린 그의 모습에 많은 팬들은 놀랐다. 이후 그는 다시 파리로 가 치료를 받으려 했지만, 의사는 백약이 무효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1985년 10월 2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평생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록 허드슨은 성 정체성에 대해 폭력적인 억압을 가했던 시대의 희생자였다. 그는 자신의 병까지 숨겨야 했으며 그가 죽은 후 보수적인 레이건 정권은 에이즈와 동성애를 엮어 게이레즈비언 운동을 탄압했다. 한편 허드슨의 연인이었던 마크 크리스천은 고인이 자신에게 에이즈임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성 관계를 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이에 법원은 부분 승소 판결을 내려 크리스천은 550만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얻어낼 수 있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