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자금과 관련,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지난 2일 대검찰청 에 출두한 손길승 SK그룹 회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현재까지 드러난 SK 비자금 정치권 유입 사건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SK그룹이 지난 2000년 총선 당시 여야 정치인 10여 명에게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씩 모두 67억원 가량을 살포한 혐의다. 두 번째는 이 돈과 별개로 지난 2000년 총선 당시 구 여권의 현역 중진의원 1명과 구 여권 고위인사인 전직 의원 1명에게 각각 20억원씩을 건네고 야당 중진의원에게도 30억원을 제공하는 등 모두 70억원 안팎을 정치권에 건넨 혐의다.
세 번째는 SK그룹이 작년 대선 직전 민주당에 대선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68억원을 제공했고 이 중 10억원 이상은 민주당이 정상적으로 회계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의혹이다. 검찰 수사는 일단 2000년 총선과 관련한 두 가지 혐의 쪽에서 본격화될 전망이다. 검찰은 6일 대검찰청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가 끝난 직후부터 금품을 수수한 정치인들을 차례로 소환할 예정이다.
총선과 관련한 SK 비자금 수수 혐의는 당연히 2000년 당시 민주당의 핵심실세들과 한나라당 중진의원에게 맞춰져 있고 이에 따라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신당 도와주기’를 위한 ‘야당 표적 사정’이라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는 지난 5일 기자간담회에서 “노무현 신당이 뜰 때 쯤이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염증을 키우려는 여러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고를 오래 전부터 한 바 있는데 (SK 비자금 사건은) 그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한 핵심인사도 “이미 사정기관 내부에서 신당 출범과 함께 정치권에 대한 대대적 사정이 진행될 것이며 이를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 나왔었다”며 ‘기획사정설’을 제기했다. 두 야당이 제기한 이 같은 의혹은 신당 핵심인사들의 발언으로 증폭되고 있다. 민주당의 장전형 부대변인의 주장에 따르면 신당의 한 중진 의원은 최근 “SK 비자금 사건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치권을 한 번 흔들 수 있다”고 말했고, 장영달 의원은 “민주당이 많이 연루돼 있을 것이고 여러 사람이 다칠 것 같은 분위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검찰측에서 흘러나오는 연루자들의 면면을 보면 이번 사건이 민주당에 치명상을 가하고 한나라당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높다. 우선 2000년 총선 당시 SK그룹은 여야 의원 10여 명에게 개별적으로 모두 67억원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총선을 앞두고 선거자금으로 돈을 받았고 비록 정상적인 회계처리를 하지 않았더라도 정치자금법상 공소시효(3년)가 이미 지난 만큼 사법처리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SK가 불법적으로 조성한 자금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치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고 그 중에는 단순한 정치자금이 아니라 대가성이 있는 자금을 받은 의원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000년 총선 전이라면 당시 민주당은 동교동계를 포함한 구주류 인사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상황. 권노갑 전 고문은 2인자였고 김옥두 의원이 총장, 정균환 총무가 특보단장, 윤철상 의원이 사무부총장으로 자금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나라당은 이회창 전 총재의 핵심 측근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검찰 수사가 관련 정치인의 소환조사와 사법처리 등으로 이어지면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당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만약 10여 명의 의원들이 줄줄이 소환당하고 그 중 일부가 사법처리된다면 내년 총선 판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 이번 사건과 연루 의혹을 받는 민주당 의원들이 상당한 정치적 압박을 받으면서 여당인 통합신당행을 서두르고 그 여파로 소위 당내 통합모임으로 분류된 의원들의 ‘탈당 도미노 현상’이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민주당의 급격한 세 위축과 통합신당의 원내 제2당 위상 확보로 이어질 수 있다. 통합신당 후보가 내년 총선에서 ‘기호 2번’을 달게 되는 것이다. 호남 유권자의 경우 그간의 정치적 경험에 의해 거의 무의식적으로 ‘기호 2번’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어 총선에서의 기호는 선거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사 이번 사건 연루 의원들이 민주당에 잔류한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타격을 받아 총선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시민단체들이 이번 사건 연루자들을 ‘퇴출대상 정치인’으로 규정, 낙선운동이라도 벌인다면 내년 총선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실제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통합신당이 지난 대선 때처럼 시민·사회단체와 노사모 등을 적극 활용, 총선구도를 개혁세력 대 반개혁세력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만약 이런 상황이 전개된다면 통합신당은 총선 이후 원내 1당 자리도 넘볼 수 있다.
▲ SK 비자금 수사가 통합신당 띄우기라는 시각이 정치권에 번지고 있다. 김근태 통합신당 원내대표, 박상천 민주당,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왼쪽부터).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들은 현재 민주당이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호남 표심을 결집시킬 수 있는 인사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사법처리 등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경우 민주당은 호남 표심을 결집시킬 동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민주당이 호남 기반을 상실하면 통합신당이 그 자리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통합신당이 수도권에서 압승하고 영남권 진출에 성공할 경우 명실상부한 전국정당으로서 원내 1당으로 부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셈이다.
이번 사건이 SK 비자금의 노무현 후보 대선자금 유입설을 사전 차단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SK 비자금 수십억여원이 당시 노무현 후보 캠프로 건네졌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 왔고 일단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 이 부분에 대한 수사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노무현 후보의 대선캠프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여권의 한 인사는 “극히 적은 액수의 후원금 외에는 어떤 돈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대선 당시 총무위원장을 맡아 대선자금을 관리했던 이상수 의원도 “대선 때 정치자금은 모두 나를 통해 들어왔고 그외 노 후보 비선 같은 것은 없었다”며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액수를 합법적으로 받았을 뿐이어서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팀은 지난 3월10일 이상수 의원이 “SK그룹도 후원금을 상당히 많이 낸 기업에 속한다”고 발언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민주당 역시 “이상수 의원은 현재까지 SK측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며 최태원 회장이 구속됐을 때 검찰 지휘부에 전화를 걸어 선처를 부탁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라며 검찰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만약 노무현 후보 캠프측이 수십억원대의 대선자금을 SK로부터 받았다면 노 대통령의 정치적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민주당 장전형 부대변인이 이번 수사와 관련,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진영에 비선을 통해 자금이 전달됐다는 설이 돌자 미리 차단막을 치기 위한 것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정치권에서는 검찰이 아무리 독립된 존재라고 하지만 그간 청와대 386 핵심참모와 검찰 고위인사의 커넥션설이 나도는 등 여전히 권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만큼 현직 대통령의 대선자금을 건드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의 한 주요 당직자는 “최근 SK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 수뇌부가 청와대와 교감하고 있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며 “결국 이번 수사에서 대선자금 부분은 유야무야될 것이고 총선자금에 대해서도 신당 관련 인사들은 빼주고 민주당 인사들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수사가 이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이 당직자에 따르면 SK와 손길승 회장의 생사여탈권을 검찰이 쥐고 있는 만큼 손 회장 역시 검찰의 입맛에 맞는 진술을 할 수밖에 없고 자연히 현 민주당 의원들이 주요 수사대상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
이와 함께 이번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검찰 내에서도 원칙주의자로 손꼽히는 인물인 데다 부산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김대중 정부하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SK 비자금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과 통합신당의 ‘정치세력 교체’ 시도와 맞물려 한국 정치의 지형을 바꾸는 최대의 정치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