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29일 노무현 대통령(오른쪽)이 최낙정 해양수산부 장관과 기념촬영하고 있다. 최 장관 은 3일 뒤 전격 경질된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우리나라 대통령은 태풍 때 오페라 보면 안되느냐”(9월26일 중앙공무원교육원 예비공무원 대상 특강)→“기자들이 있으면 말 못하겠다. 갈 데까지 갔으니 옷을 벗겠다”(9월30일 목포 해양대 특강)→“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교장으로 올라가고 해도 아무 소용없다”(10월1일 한국교원대 연수원 교장연수생 대상 특강) 등 일련의 ‘부적절 발언’으로 ‘낙마’한 당사자의 소회로는 파격적인 언급이다.
이어지는 경질 이유가 더 걸작이다. “나의 순수가 통하리라 생각하고 믿고 살아왔는데 장관 되니깐 그게 안 통하더라. (내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설치는 공무원’ ‘튀는 공무원’의 상징으로 부상하며 ‘고속 승진→2주짜리 장관’이란 롤러코스터를 탔던 최 전 장관은 그렇게 물러갔다. 최 전 장관은 현 정부 출범 후 가장 주목받은 관료 중 한 명이었다. 거침없는 언행으로 행정고시 동기(17회) 중 일찌감치 ‘걸물’로 인정받았던 점도 그렇지만, 노무현 대통령과의 각별한 인연을 토대로 연공서열을 훌쩍 뛰어넘어 ‘파격 승진’을 거듭했다는 점은 여러모로 화제를 낳았었다.
1953년 7월10일 경남 고성생인 최 전 장관은 고려대 법학과 4학년 시절인 75년 행시에 합격한 후 줄곧 해양수산 분야에서 잔뼈가 굵어온 전문관료. 75년 해운항만청 행정사무관으로 공직에 발을 디딘 후 주 영국대사관 해무관(88년) 마산지방해운항만청장(95년)을 지냈고 해양부 출범 후에는 수산물유통국장(97년)→항만정책국장(98년)→부산지방해양수산청장(99년) 등 주요 보직을 거친 후 2000년 12월 1급(관리관)으로 승진,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2000년)과 기획관리실장(2001년)을 지냈다. 현 정부 들어 그의 출세가도는 더욱 빨라져 3월 초 최연소로 정부부처 차관에 기용됐으며 6개월 만인 지난 9월에 장관에 임명됐다.
최 전 장관은 공직 시작 후 승진에서 줄곧 선두를 달렸다. 국장·1급 승진은 옛 해운항만청 행시 동기인 김종태(현 사이버로지텍 대표이사), 김성수씨(현 한국해운조합 이사장)에 비해 1~2년 늦었지만 두 사람이 최 전 장관보다 6세나 많다는 점(47년생)을 감안하면 그를 ‘선두주자’로 평가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해양부엔 현재 서정호 기획관리실장과 J국장, 두 명의 L국장 등 최 전 장관 동기들이 근무중이며 다른 부처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나 최 전 장관이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노 대통령과의 ‘남다른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 정설. 두 사람은 노 대통령이 지난 99년 2월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부산·경남에서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후 지역 표밭갈이에 분주한 행보를 하던 도중 만나게 됐다. 그해 4월 당시 동남권발전특위 위원장이었던 노 대통령은 현안이었던 부산 신항만 건설사업과 공사구역 인근 가덕도 어민들의 ‘한정 어업면허’ 허용건과 관련해 부산지방해양청장이었던 최 전 장관을 만나 “한판 붙었다”고 할 만큼 논쟁을 벌인 바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노 대통령이 20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되고, 그해 12월 부산해양청장이던 최 전 장관이 1급 승진과 함께 본부 근무를 하면서 본격화됐다. 당시 노 대통령은 부내 주요 현안과 관련, 업무라인 밖에 있는 최 전 장관에게 자문을 자주 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노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최 원장이 부내 관료 중 발상과 업무기획력 면에서 가장 돋보인다”고 자주 언급했다는 후문.
이 시절 최 전 장관이 노 대통령에게 제공한 아이디어 중 하나가 참여정부 출범 후 관료인사의 원칙으로 자리잡은 ‘다면평가제’. 최 전 장관은 지난 98년 IMF 직후 해수부에서 초보적인 차원에서 시행중이던 다면평가제를 전면도입할 것을 건의했고, 노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당시 국장급에서 그쳤던 이 제도를 하위직급까지 확산시켰다.
두 사람을 둘러싼 ‘일화’도 많다. 노 대통령이 장관직을 물러난 지 2개월여 후인 2001년 5월 해양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특강에서도 최 전 장관은 ‘튀는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그는 당시 특강 후 일문일답에서 노 대통령에 “민주당 후보가 되겠다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너무 아양 떨지는 말라”고 말해 강연장을 한때 긴장시켰다. 당시 한 참석자는 “최 전 장관이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모두가 놀랐고 노 대통령 얼굴에도 언뜻 불쾌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며 “그러나 노 대통령은 강연이 끝난 후 배웅에 나선 그에게 웃으며 ‘당신이 한 얘기 유념하겠다. 앞으로도 많이 도와달라’고 말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적이 있다”고 말했다.
최 전 장관의 노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도 남달랐다는 게 정설. 지난달 30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대통령이 위기에 처했는데 국무위원들이 몸으로 막아야 될 것 아니냐”고 ‘일갈’한 것을 두고 ‘노(蘆)비어천가’ 논란이 일었지만 그는 일찍부터 ‘노무현 사람’으로 평가받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평이다. 일례로 노 대통령의 지지도가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했던 2002년 7~9월께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노 후보는 꼭 당선된다. 지지도도 곧 반등할 테니 두고 보라”는 얘기를 해왔고, 이 사실이 당시 노 후보 측근들의 귀에 들어가 캠프 내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캠프 핵심 포스트를 맡았던 청와대 386 비서관은 “한창 어려웠던 시절 최 전 장관이 노 후보 지지를 당부하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확인을 해 보니 사실이었다. 당시 분위기에서 비록 한때 모셨던 장관이라 하더라도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예외였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최 전 장관 경질 다음날(3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오랫동안 검증된 사람인데…”라고 언급한 것에는 능력과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하게 경질할 수밖에 없게 된 데 대한 아쉬움이 배어 있다는 평가다.
최 전 장관의 튀는 면모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상하 관계를 떠나 말을 놓는 이른바 ‘야자타임’. 차관 시절 부하 직원들과 가진 회식 자리에서 최 전 장관이 ‘야자타임’ 개시를 선언하자마자 한 여직원으로부터 “야, 최낙정. 너 이제부터 말 좀 그만해라. 시끄러워서 다른 사람들이 얘기를 할 수 없잖아”라고 ‘한방’ 먹었던 사실은 해양부 내에서 ‘전설’로 남아 있다.
이기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