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LG-넥센전의 결정적인 오심이 심판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요즘처럼 오심 시비가 빈번하거나 아리송한 홈런 타구가 많을 땐 대기심의 역할이 더 커진다. 그라운드의 심판들이 보지 못하는 장면을 대기심은 심판실의 TV를 통해 정확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홈런 여부를 가리는 비디오 판정도 따지고 보면 대기심의 몫이다.
그렇다면 4개조가 경기에 투입될 때 1개조는 뭘 할까. 2군에 내려간다. 5개조는 한 주씩 돌아가면서 2군 경기 심판을 본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치열한 1군 무대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군 선수들에게 질 높은 판정 서비스를 하는 것이다.
2군 선수들은 “확실히 1군 심판은 2군 심판과 다르게 스트라이크 존이 정확하고, 아웃과 세이프 판정도 섬세하다”며 “주기적으로 1군 심판들을 접하다보니 1군에 올라가도 스트라이크 존 때문에 크게 당황하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순번이 아닌데도 2군에 내려가는 심판들도 있다. 1군에서 크나큰 오심을 범했을 때다. 6월 16일 넥센-LG전에서 2루 포스아웃 상황을 세이프로 판정하며 오심 논란에 휩싸였던 박 아무개 심판이 대표적이다. 박 심판은 오심 논란에 휩싸인 당일, 2군행을 통보받았다.
KBO 심판위는 조종규 심판위원장이 리더다. 조 위원장 아래 현역 심판 가운데 가장 경력이 많은 한 명이 차장을 맡는다. 그리고 5개조마다 팀장이 있어 각 조를 지휘한다. 상하 수직체계가 분명한 조직이기에 시쳇말로 군기가 세다.
넥센 염경엽 감독(가운데)이 심판에 항의하는 모습.
지금은 심판들 사이의 군기가 많이 약해졌다. 연차가 낮은 심판도 구심을 보고, 경기가 끝나면 일반 직장인들처럼 서로를 터치하지 않는다. 그래도 위계질서는 남아 있어 후배 심판은 선배 심판을 깍듯하게 모신다.
대우는 많이 좋아졌다. 과거 심판들은 여관에서 묵었다. 그것도 2인 1조가 기본이었다. 교통비도 개별 지급되지 않아 지방 경기 시 심판들은 차 한 대에 4명이 함께 타 이동했다. 연봉은 말할 것도 없다.
경력 15년 이상의 고참 심판은 “불과 6~7년 전만 해도 고참 심판 연봉이 5000만~6000만 원 사이였고, 경력 5년 차 이하의 심판은 3000만 원도 되지 않았다”며 “초임 심판은 프로야구 최저 연봉에도 못 미치는 2000만 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심판 대우가 좋아진 건 2008년 12월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이 KBO 총재를 맡았을 때부터다. 유 전 총재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는 야구인들의 처우 개선 없이 질 높은 프로야구는 기대할 수 없다”며 “기록원과 심판원의 처우를 대폭 개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 전 총재의 지시 이후 KBO는 심판들의 숙소를 장급 모텔에서 관광호텔로 상향 조정했다. 연봉 인상과 각종 수당 역시 신설해 심판원들의 처우를 대폭 개선했다. 유 전 총재가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심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면회를 가 감사함을 나타냈다.
유 전 총재를 거쳐 구본능 현 총재를 거치며 심판 연봉은 조금씩 올라 현재 1군 심판의 평균 연봉은 6000만 원, 팀장급 심판은 1억 원 가까이 된다.
지난 5월 한화와 KIA의 경기에서 심판의 판정에 거세게 항의하는 선동열 KIA 감독. 연합뉴스
시즌 전 KBO 심판들은 조를 나눠 국내 구단의 국외 스프링캠프를 찾는다. 심판들도 판정 실력과 감각을 유지하려면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한국과 일본 프로 팀의 연습경기가 열리면 한일 심판이 한데 어울려 판정을 본다. 이때 경기가 끝나면 일본 선수들과 심판들이 항상 하는 말이 “한국 심판이 더 낫다”는 소리다. 스트라이크 존은 두 나라가 다를지 몰라도 판정의 일관성과 체크스윙 여부는 한국 심판이 일본 심판보다 뛰어나다는 뜻이다.
일본 심판들은 그 이유로 “한국 심판들이 현역 프로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한국 심판 43명 가운데 95%는 프로 출신이다. 반면 일본은 현역 프로 출신 비율이 50% 남짓이다. 오심을 자주 범하는 심판들도 대개 비프로 출신이라, 일본 프로야구계에선 “100% 프로 출신 심판을 써야 한다”고 목소릴 높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한국은 “비프로 출신 심판을 기용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래야 심판진의 파벌을 막고, 기존 심판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게 이유다. 물론 비프로, 비선수 출신을 심판으로 기용하면 이점도 있다. 선후배 위계질서가 엄격한 국내 야구 문화 탓에 선배 심판이 후배 감독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건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판정의 질에 있어선 비프로, 비선수 출신 심판이 프로 출신보단 떨어질 것이라는 게 야구계의 중평이다.
KBO 관계자는 “심판 권위 추락과 판정의 질을 높이기 위해 올 시즌이 끝나면 심판진 운영과 관련한 매뉴얼을 내놓을 예정”이라며 “오심이 거듭된 심판을 퇴출하는 등 강도높은 개혁안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문제아 길들이기? 그럴 힘 없다”
심판 오심이 잦았던 지난 6월. 프로야구 심판들은 각종 음모론에 시달렸다. 내용인즉슨, 심판들이 똘똘 뭉쳐 자신들에게 밉보인 선수에게 판정 불이익을 줘 이른바 ‘문제아 길들이기’를 했다는 것이다. 여기다 특정 세력의 사주를 받아 정규 시즌 1위를 달리던 넥센을 억지로 끌어내리려 오심을 자행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심판들은 물론이려니와 특정 구단과 해당 선수가 각종 음모론과 관련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며 소문은 잠잠해졌다.
사실 현장의 심판들은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힘이 세지 못하다. 원체 감시의 눈길이 많아 음모론 따위를 계획할 수도 없다.
한 심판은 “일부 언론과 팬들이 심판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그라운드의 왕’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럴 때마다 과연 어느 왕이 1년 계약직 신세인지 묻고 싶다”며 “심판이야말로 해마다 고용 불안에 떠는 약자 중의 약자”라고 하소연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프로야구 심판은 자신들의 고용인인 한국야구위원회(KBO)와 1년씩 계약을 맺는다. KBO는 심대한 오심을 되풀이하거나 승부조작 연루 등 ‘특별한 결격 사유’가 발생하지 않으면 계약을 갱신한다. 하지만, ‘특별한 결격 사유’가 문제다. 결격 사유 여부를 판단하는 건 순전히 KBO의 주관적 판단에 따르기 때문이다.
한 베테랑 심판은 20년 전 프로야구를 회상하며 이렇게 털어놨다.
“당시 야구계에서 존경하던 L 심판이 있었다. 하지만, L 심판이 원체 강직한지라, KBO 수뇌부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당시엔 KBO 수뇌부나 특정 구단 입김이 셌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KBO 수뇌부 가운데 어느 이가 심판위원회에 모 구단에게 유리한 판정을 하라는 암묵적인 지시를 했다. L 심판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얼마 못가 KBO는 ‘L 심판이 심판을 수행하기엔 결격 사유가 많다’며 그를 현역에서 물러나게 했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져 KBO 수뇌부의 입김이 심판들에게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KBO 수뇌부도 그런 압박은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심판들의 생사여탈권을 KBO가 쥐고 있는 이상 심판들의 ‘KBO 눈치 보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심판들은 미국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처럼 심판부가 KBO로부터 독립하길 바란다. 많은 야구인도 “공정한 판정과 외부 입김을 최대한 차단하기 위해서 심판위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심판은 “지금처럼 정년 보장은 고사하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한 고용 상황에선 심판들이 자기 색깔을 갖고, 엄정한 판정을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KBO는 심판위 독립과 관련해선 “아직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