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 ||
이건희 전 회장 조기 사면설은 이미 지난 8월부터 재계와 정가 관계자들 사이에 대두돼왔다. 당시 이 전 회장 측이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 발행 사건 항소심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 대법원 재상고를 포기하자 ‘연말 사면을 염두에 둔 머리 조아리기’로 해석된 것이다.
지난 10월엔 ‘삼성 냉장고 폭발 사고에 이 전 회장이 대로했다’는 내용이 각종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이 전 회장 리더십 부재에 대한 아쉬움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됐다. 그러나 삼성에 이건희 전 회장이 필요하다는 논리만으로 조기 사면 명분을 충족시킬 순 없는 일. 결국 여론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국내 유일의 IOC 위원인 이 전 회장이 사면을 받아 IOC 활동을 재개해야 한다는 식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지난 11월 17일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인 김진선 강원도지사가 이 전 회장 사면 필요성을 공개주장하고 나서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체육계와 경제단체들이 앞 다퉈 사면 건의를 하고 나섰다. 11월 말에 접어들면서 정·재계엔 이 전 회장의 성탄 사면설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올 2월 12일부터 28일까지 개최되는 캐나다 밴쿠버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IOC 위원들을 상대로 유치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논리에서였다.
청와대 내에서도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이 전 회장 사면 여부에 대한 숙고가 있었다고 한다. 12월 초 청와대의 한 유력인사는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이 전 회장 사면 계획을 기정사실화하는 듯 “(이건희 전 회장 성탄절 사면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평창 선정이 IOC 위원 한 명 더 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신년 설이나 삼일절은 몰라도 성탄절은 무리”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재계와 정치권 일각에선 정부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보다 세종시 투자 유치에 더 무게를 두고 이건희 전 회장 사면을 추진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지난 11월 초 ‘청와대가 지난 10월 31일 이명박 대통령과 4대 그룹 회장과의 간담회를 추진했으나 간담회 직전에 취소됐다’는 내용이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됐다.
청와대는 즉각 회동 추진 자체를 부인하고 나섰으나 추진 진위를 떠나 세종시 투자를 이끌어내려는 정부와 친기업 정책을 유도해내려는 재벌들 간의 물밑 교감에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번 사면 소식을 접한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정부와 삼성 사이에 세종시 투자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끝났을 것”이란 말이 오가고 있다.
이번 사면으로 이 전 회장이 경영일선에 복귀할지에 대한 재계의 궁금증도 커지는 상황이다. 재계에선 지난 2008년 4·22 삼성 쇄신안 발표를 통해 이 전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이 전 회장이 삼성 경영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이 전 회장 외아들 이재용 전무의 부사장 승진과 세대교체형 인사 단행은 이 전 회장의 ‘이재용 시대’ 연착륙을 위한 결단으로 풀이되고 있다.
일각에선 이 전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복귀하는 수순을 그려보기도 한다. 이재용 부사장이 대표이사급 사장으로 승진하는 데 적어도 1~2년 걸릴 것으로 관측된다. 이 부사장이 승계를 위한 실적과 명분을 쌓을 이 기간 동안 이 전 회장의 그룹 내 존재는 든든한 뒷배가 돼 줄 것이란 기대를 낳는다.
이와 더불어 김순택 삼성SDI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이동하면서 그가 단장을 맡은 신사업추진단에 주목하는 시선도 많다.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의 새 먹을거리 찾기에 나설 것으로 보이는 이 조직이 이 전 회장의 손발 노릇을 했던 옛 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김 부회장이 구조조정본부 전신인 회장 비서실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비서실장 보좌역까지 지낸 경력에도 눈길이 쏠린다.
재계에선 삼성 측이 이 전 회장 경영복귀를 위해 여론조성 등의 ‘수순 밟기’에 들어갈 것이라 보기도 한다. 지난해 4·22 삼성쇄신안을 내놓을 때 발표된 1조 원가량의 이 전 회장 차명재산 사회환원 계획이 조만간 구체화될 것이란 관측도 곁들여진다. 단독사면이란 커다란 ‘선물’을 받은 이 전 회장이 경영복귀 관측 속에 어떤 행보를 취하게 될지에 온 재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