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물간 손민한 화려한 재기
6월 29일 마산구장에서 열린 두산-NC전을 지켜보던 황병일 두산 수석코치는 연방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게 NC 선발 손민한은 이날 두산 타선을 상대로 6회까지 4피안타, 2볼넷으로 무실점 투구를 펼쳤다.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해 승패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이날 손민한의 투구는 18승 7패 평균자책 2.46를 기록했던 2005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땐 손민한이 31세 때고, 지금은 39세다. 거기다 (손)민한이는 4년 동안 쉰 투수 아닌가.” 황 수석은 마흔이 다 된 투수가 4년 공백을 깨고 이토록 호투하는 게 마냥 신기한 듯 보였다.
기록만 보자면 손민한의 투구는 놀라움 이상이다. 6월 5일 마산 SK전에서 시즌 첫 선발등판을 했을 때만 해도 그의 성공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2009년 이후 1378일 만에 1군 마운드에 선 데다 4년 동안 한국 프로야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까닭이었다. 특히나 어깨수술 이후 손민한은 ‘한물간 투수’로 통했고, 한국프로야구선수협 회장 재임 시절 초상권 비리 문제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후배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터였다.
그런 손민한이 마운드에 서자 야구전문가들은 하나같이 “5회를 못 버티고 강판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반대였다. 이날 손민한은 5회까지 1실점하고서 1407일 만에 승리투수가 됐다. 스피드건에 찍힌 속구 최고 구속도 시속 147㎞를 기록하며 손민한은 2000년대 중반 한국 프로야구를 호령하던 롯데 에이스 그 손민한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이날 경기를 ‘우연’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손민한은 열흘 뒤 마산 삼성전에서도 5⅓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해 승리투수가 됐고, 21일 목동 넥센전에서도 7이닝 1실점으로 다시 승리를 따냈다.
손민한은 3승 무패 평균자책 0.77(이하 7월 5일 기준)의 눈부신 호투를 펼친 끝에 프로야구 6월 MVP에 등극했다. ‘한물간’ 투수의 화려한 재기에 야구계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손민한의 고려대 1년 선배인 손혁 MBC SPORTS+ 해설위원은 “전성기와 견줘 올 시즌 투구가 더 뛰어나 보인다”며 “속구 구위는 떨어졌을지 몰라도, 제구와 완급조절, 타자의 심리를 이용하는 노련한 투구는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평했다.
손 위원은 “원체 손민한의 투구 질이 좋아 올 시즌 내내 호투를 펼칠 것으로 예상한다”며 “부상만 조심한다면 2~3년간은 마운드에 설 것”으로 내다봤다.
# ‘미스터 럭키’ 류제국
서울 덕수고를 졸업하고 2001년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와 160만 달러에 계약한 류제국은 ‘제2의 박찬호’가 기대됐던 최고 유망주다. 그러나 2010년까지 5개 팀을 전전하며 빅리그에서 1승 3패, 평균자책 7.49를 남기고 쓸쓸하게 귀국했다.
막상 귀국했지만, 그를 반기는 이는 많지 않았다. 팔꿈치 부상과 물수리 사건이 악평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류제국의 지명권을 쥐고 있던 LG는 그의 재기를 반신반의했다. 결국 LG는 류제국과 바로 계약하지 않았고, 류제국은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수행하며 재기를 노렸다.
결국 올 1월. LG는 우여곡절 끝에 류제국과 입단 계약을 마쳤다. 하지만, 이때도 LG는 큰 기대를 걸지 않는 눈치였다. 김기태 LG 감독은 “일단 몸을 만드는 게 급선무”라며 “올 시즌 류제국을 전력 외 선수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5월 19일 류제국이 잠실 KIA전에 첫 등판하며 모든 게 변했다. 당시 류제국은 5 ⅓이닝 동안 4실점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이후에도 등판하는 경기마다 팀을 승리로 이끌며 어느덧 당당한 5선발이 됐다. 공교롭게도 류제국이 1군에 합류한 이후부터 LG가 연전연승을 거두며 류제국은 LG팬들로부터 ‘미스터 럭키’로 불리고 있다.
조용준 MBC SPORTS+ 해설위원은 “류제국은 기본적으로 타고난 능력과 자질이 뛰어난 투수”라며 “모국어를 쓰는 동료들과 함께 뛰며 심적 부담도 줄고, 투구에도 자신감이 붙었다”고 평했다.
조 위원은 “속구 구속이 더 오를 여지가 있다”며 “제구와 변화구 구사능력이 뛰어난 만큼 올 시즌 충분한 경험을 쌓는다면 내년 시즌엔 LG 선발진에서 원투펀치로 뛸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 ‘핵잠수함이 돌아왔다.’
김병현이 최근 경기에서 연이어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하는 등 한국 야구에 점점 적응해 나가고 있다.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김병현은 6월 25일 목동 SK전에서 6이닝 3실점으로 6경기 만에 퀄리티스타트(QS)를 기록한 데 이어 30일 대전 한화전에선 6⅓이닝을 던져 무실점을 기록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이강철 넥센 수석코치는 “김병현의 속구와 슬라이더가 날카로워졌다. 특히나 좌우 코너워크가 몰라보게 좋아졌다”며 “지금 투구라면 올 시즌 10승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수석에 따르면 김병현의 부활은 “한국야구 스타일을 받아들이면서부터”라고 한다. “김병현은 메이저리그에서 큰 획을 그은 대투수다. 하지만, 지금은 전성기가 지났고, 여긴 한국이다. 지난해 ‘힘 대 힘’의 메이저리그 스타일을 고집했다면 올 시즌엔 한국야구의 특성을 고려해 타자를 유인하는 지능적인 투구를 펼치고 있다. 6월 중순 이후엔 김병현이 한국야구 파악이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인다.”
김병현도 최근 투구에 만족하고 있다. 김병현은 “팀이 8연패에 몰렸을 때 내가 아닌 팀을 위해 던져야 한다고 다짐했다”며 “10승보단 팀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데 온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 ‘만년 유망주’의 변신
조영훈, 사진제공=NC 다이노스
김주형(KIA)과 조영훈(NC)도 그런 운명에 처할 뻔했다. 광주 동성고를 졸업하고 2004년 KIA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한 김주형은 고교 시절 당시 대구고 박석민(삼성)보다 평가가 좋았다. 키 185㎝에 몸무게 100㎏의 좋은 체격 조건을 지닌 데다 파워도 뛰어나 ‘초고교급 타자’라는 수식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다.
하지만, 정작 프로에 입단하자 김주형은 ‘초고교급 선수’는 고사하고, 1군 전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파워는 좋지만, 타격 정확성이 떨어지고, 선구안이 엉망이었다. 여기다 1루 수비력도 떨어져 김주형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한 시즌도 90경기 이상 출전하지 못했다.
구단 내부에선 그런 김주형을 트레이드감이나 보상선수로 내줘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KIA는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김주형을 감쌌다. 그리고 결국 올 시즌 김주형은 타율 3할7리, 5홈런, 17타점으로 KIA 타선의 중심이 됐다.
조영훈의 만개는 더 극적이다. 삼성 입단 시 그의 별명은 ‘제2의 이승엽’이었다. 계약금도 2억 원 가까이 받았다. 삼성은 일본 무대로 떠난 이승엽의 공백을 조영훈이 메워주길 바랐다. 2006년 타율 2할8푼3리, 2홈런, 26타점으로 가능성을 보이자 삼성은 조영훈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조영훈은 타격 정확성과 수비에서 문제점을 드러내며 지난해 KIA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자 다시 NC에 특별지명돼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조영훈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단점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절망감이 ‘순둥이’ 조영훈을 독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올 시즌 조영훈은 타율 3할1푼9리, 3홈런, 24타점으로 NC 중심타자로 우뚝 섰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재기에 성공한 선수들 모두 몸 상태나 능력치는 크게 바뀐 게 없다. 그보단 마인드가 변한 게 성공의 배경이 됐다. 야구는 실력보단 노력, 노력보단 멘털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