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실리2㎞>의 한 장면.
하지만 현장 조사가 이뤄진 그날 저녁, 여 씨의 유족들이 경찰서를 찾아와 강하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경찰은 도로교통공단에 사고 조사를 의뢰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박 아무개 경위는 “도로교통공단에 의뢰해도 사건 결과가 번복될 이유는 절대 없다. 도로교통공단의 사고조사원들이 유능한 사람이 많다”며 김 씨 측의 동의를 설득했다고 한다.
도로교통공단의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 후. 그런데 경찰의 자신감과는 달리 조사 내용은 전혀 상반된 결과를 띠고 있었다. 김 씨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한 가해 차량으로 뒤바뀐 것이다. 더군다나 경찰이 도로교통공단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실황보고서에는 김 씨가 혈중 알코올 농도 0.281%의 만취 상태로 ‘음주운전’을 했다는 사실까지 추가되어 있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김 씨 측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 씨는 경주시 소속 공무원으로 오전 9시에 출근해 공무를 수행하는 중이었기에 만취를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게 김 씨 측 주장이었다. 의혹은 ‘채혈 과정’ 속에 있었다. 의식 불명 상태인 김 씨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 간호사가 김 씨의 팔을 소독약이 담긴 솜으로 문질러 채혈했는데, 이를 경찰이 압수해 혈중 알코올 농도를 측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독 전용 솜에는 알코올 성분 ‘78.85%’가 함유되어 있었다고 한다. 김 씨의 음주운전 사실은 후에 검찰에 의해 ‘혐의 없음’으로 인정되게 된다. 검찰은 “혈중 알코올 농도 측정용 소독약이 아니라 알코올 성분이 함유된 검사용 소독약으로 채혈한 혈액을 압수한 점, 사고 후 김 씨를 진료했던 간호사가 김 씨의 만취 여부를 알지 못한 점을 인정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이렇듯 음주 운전 여부는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지만, 이번엔 결론이 뒤바뀌게 된 직접적인 원인인 도로교통공단의 감정 보고서에 대한 의혹이 떠올랐다. 김 씨는 감정 보고서에서 여러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경찰과 대동한 현장 조사와는 다르게 여러 사고 증거들이 누락되어 있었던 것. 김 씨는 “충돌 후 여 씨의 B 차량이 (찻길)우측 가드레일을 받은 사실이 있는데 이 부분이 감정서에는 누락되어 있었다”며 “사고결과를 바꾸려고 증거를 배제한 것이 아니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감정보고서의 허점을 발견한 김 씨는 재조사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는 받아들여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재조사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재조사 결과도 마찬가지. 도로교통공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로 김 씨의 차량은 여전히 가해 차량으로 지목되게 된다. 그런데 국과수 내부에서도 이 사건과 관련한 의견 충돌이 상당했다는 정황을 포착할 수 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국과수 연구원 하 아무개 씨가 “국과수 내부 감정인(전 아무개 씨)과 의견다툼으로 통일된 감정서를 제출하지 못했다”라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통상 국과수에서는 연구원 2명이 주심과 부심으로 나뉘어 교통사고를 조사한다고 한다. 판단을 연구원 혼자 내리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만약 주심과 부심의 의견이 충돌된다면 서로 합의를 하고 통일된 결론을 내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주심과 부심의 의견이 끝까지 합의되지 않았다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증인으로 출석한 하 씨는 국과수 재조사 당시 현장 조사를 실시해 B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또 다른 연구원 전 씨가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가해 차량은 A 차량”이라고 하 씨와 반대되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현장 조사 결과가 또다시 뒤바뀐 셈이다. 김 씨는 “현장에서 조사한 하 씨의 의견은 무시되고 내근 근무자인 전 씨 주도로 결과가 도출됐다”며 “전 씨의 시뮬레이션 값도 잘못된 부분이 많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전 씨가 도출한 시뮬레이션 데이터 값은 법원 상급심에 제출할 때마다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사실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에 전 씨는 “김 씨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라며 “이미 법적인 판단은 끝났고 합리적 답변을 내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전했다.
공판 진술서. 판사가 증인의 진술을 삭선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로 적었다.
이밖에도 이 판사가 증인 진술과 관련해 수정한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실제로 <일요신문>이 입수한 항소심 공판진술서에는 이 판사가 증인 진술을 삭선하고 새로 문장을 적은 흔적이 8곳이나 발견됐다. 수정된 문장은 잘못된 어휘를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문장을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한편, 뉘앙스를 다르게 하는 흔적이 여럿 포착되기도 했다.
항소심이 진행됐던 대구지방법원 관계자는 “공판진술서를 작성할 때 불필요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함축적으로 적는 경우도 있다”며 “만약에 수정을 가할 경우 판사와 사무관, 법원 직원 등이 서로 간 의미가 맞는다고 동의하에 하기 때문에 이 같은 경우에도 그럴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판진술서를 과도하게 수정했다는 의혹은 지워지지 않는 상황이다. 불필요한 부분을 수정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과도하다’는 것. 대법원 판결 후 김 씨는 삭선이 여기저기 그어진 공판진술서를 입수하고 여러 변호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만나는 변호사마다 “판사를 상대로 이길 순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그러다 김 씨는 결국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로 박찬종 변호사(전 국회의원)를 찾아가기에 이른다. 김 씨는 “박 변호사가 이 문건을 접하곤 ‘이것을 어떻게 구했냐. 머리털 나고 이런 건 처음 본다’라며 화들짝 놀라더라”라고 전했다.
김 씨가 가져 온 공판진술서를 보고 박 변호사는 ‘재심청구서’를 작성해 줬다고 한다. 박 변호사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혹시라도 공판조서를 수정하더라도 진술한 취지에 맞게 해야지 이 정도면 허위 공문서를 작성했다 싶을 정도로 과도하다. 이 정도로 수정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행위라고 생각했기에 재심청구를 한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재심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 기각 사유였다. 김 씨는 “결국 공판진술서 변조에 대해 판사를 고소를 해서 확정 판결을 받으라는 얘기인데 실질적으로 이게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씨 측은 잇따라 이어진 대법원 판결에서도 피의자로 확정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음주운전 누명, 조사 과정에서의 의문점, 공판진술서 수정 등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기까지 겪었던 석연찮은 과정에 현재까지도 김 씨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조사 결과 바뀌는 일 드물어”
경찰이 시행한 교통사고 초동수사가 도로교통공단에 의뢰되는 경우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양측 차량의 주장이 서로 엇갈려 팽팽할 때 혹은 사고현장에 의문점이 많아 가해, 피해 차량을 제대로 가릴 수 없을 경우다.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한해 통상 3000여건 내외로 조사 의뢰가 들어온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중 경찰조사가 바뀌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한다. 교통사고감정원 이준호 원장은 “도로교통공단의 감정은 경찰 조사를 토대로 확인하는 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라고 전했다. 도로교통공단 관계자 또한 “조사 결과가 뒤바뀌는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그런 사례가 많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전했다.
도로교통공단에서 내려진 결론이 논쟁이 있을 경우에는 국과수 조사까지 시행할 수도 있다. 두 기관의 조사는 경찰이 결론을 내리는데 ‘참고용’으로 쓰인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결국 최종 결정은 경찰의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최초 실황조사서 은닉”
판사의 공판진술서 수정 사실은 김 씨가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 문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우연찮게 발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 씨는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또 다른 사실을 포착해냈다고 주장했다. 바로 사건을 초기부터 담당한 박 아무개 경위가 처음에 작성한 교통사고 실황조사서를 은폐했다는 주장이다.
박 경위가 2008년 8월 18일 최초 작성한 실황조사서는 김 씨의 차량이 피해차량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난 10월 2일 실황조사서에는 반대로 여 씨의 차량이 피해차량으로 바뀌며 김 씨의 음주사실이 추가되어 있다. 김 씨는 “박 경위는 자신이 최초 작성한 실황조사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처럼 숨겼다.
심지어 2차 실황조사서를 작성하며 8월 18일에 했던 현장조사를 19일에 했다고 하기도 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2년 후에야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됐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박 경위는 “양 측의 의견이 팽팽한 상황에서 도로교통공단과 국과수에 의뢰해 실황조사서를 작성한 것일 뿐 실황조사서를 숨길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며 “실황조사서에서 나온 피해차량과 가해차량도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현재 김 씨는 박 경위를 공용문서 은닉과 허위 공문서 작성 죄로 검찰에 고소한 상태다. 사건 발생 후 5년이 지났지만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경찰·가해자 ‘짬짜미’도
교통사고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1995년에 발생한 남기훈 씨 교통사고가 대표적인 경우다. 당시 남기훈 씨는 최초 경찰 조사에서 피해자로 지목됐으나 이후 목격자 진술과 추가 조사를 토대로 가해자로 지목돼 징역 1년 6개월의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았다.
남기훈 씨의 아버지 남선우 씨는 이러한 결과에 의심을 품고 7년에 걸쳐 사건을 파헤친 결과 경찰관의 허위공문서 작성사실, 경찰관과 가해자, 목격자 등이 위증을 한 사실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이후 혐의가 인정돼 사건은 재심에 청구되었고 5심까지 가는 유례가 없는 송사가 이어지기도 했다.
보험소비자연맹 교통사고피해자구호센터 관계자는 “최근에는 CCTV나 블랙박스의 발달로 가해 차량과 피해 차량을 대부분 명확하게 가려낼 수 있다”며 “하지만 이러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을 경우 쉽게 결과가 도출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라고 전했다.
한편 교통사고피해자구호센터는 교통사고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경우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의식불명인 경우, 피해자 측의 보험사가 없는 경우, 피해자 측이 목격자가 없거나 경찰의 판단 착오인 경우, 가해자 측이 권력이나 금권으로 조작하는 경우, 동일 보험사로 피해자 측 보험 금액이 적은 경우 등이 바로 그것이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