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노무현 대통령이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온 기자회견 후 퇴장하고 있다. 청와대사 진기자단 | ||
먼저 노 대통령은 측근비리와 국정혼란으로 인한 내적 위기를 국민투표라는 외적 돌파구를 통해 돌파함으로써 참여정부의 떨어진 추진력에 ‘중간 급유’를 할 생각이다. 모든 것을 건 이 위험한 ‘도박’이 그의 소신대로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정치’로 자리매김될지는 온전히 국민의 ‘손’에 달려 있다. 노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헌정사상 초유의 정치환경 때문에 정치권은 저마다 ‘수읽기’에 골몰해 있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재신임을 ‘미끼’로 ‘정치도박’에 나선 배경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지난 10월10일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언급한 직후 한나라당 당사 곳곳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당의 한 관계자는 “최근 지지도가 급속히 추락하자 드디어 노 대통령이 두 손을 든 것 같다. 수권정당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며 희색이 만면했다. 최병렬 대표도 같은 분위기였다. 그는 “국민투표를 즉시 받아야 한다”며 재신임 공언을 기정사실화했다.
한나라당은 재신임 정국 초반에 ‘대통령이 한계에 이르렀으니 국민투표(제의)를 받아야 한다’며 희희낙락하다가 노 대통령이 최근 내비친 ‘구태 정치 척결’이라는 ‘비수’를 본 뒤부터 국민투표 신중론으로 돌아섰다. 한나라당은 초반 재신임 정국 대응에서 지도부의 ‘흥분’ 등 신중하지 못한 처신으로 노 대통령이 던져준 ‘피 묻은 고깃덩어리’(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제의)를 이미 반쯤 입에 문 상태다. 노 대통령이 ‘피 묻은 고깃덩어리’를 던져 주니까 ‘이 기회를 통해 완전히 정권을 넘어뜨릴 수 있지 않을까’하며 그 고기를 덥석 물어버린 꼴이다. 하지만 결과는 노 대통령이 만든 구태 정치 청산의 덫에 걸려버린 형국으로 치닫고 있다.
윤여준 한나라당 의원은 노 대통령의 첫 기자회견(10일) 직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속셈을 잘 간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최근 노 대통령은 국정을 원만히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에 와버렸다. 정권의 도덕성과 효율성이 동시에 무너진 것이다. 어차피 노 대통령으로서는 뭔가 전기를 만들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문제를 원칙과 정도로 풀려고 하는 사람들의 자세 같으면 왜 자신이 국민들에게 이처럼 불신을 받는가 하는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로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이런 정도를 가지 않고 자기 딴에 정면돌파를 하려는 카드를 쓴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가뜩이나 국민들이 경제가 어렵다고 느끼고 안보가 위험한 상황에서 불안해하고 있는데 여기에다 대통령이 저런 식으로 하면 국민들이 혼란 때문에 극도의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 국민의 심리를 노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해놓고 거기다가 국민들에게 선택하라고 하면 국민들이 결국 혼란이 두려워서 자신을 재신임할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무책임한 행위이고 고도의 정치술수라고 봐야 한다.”
윤 의원은 당의 대응방식에 대해서도 “당이 저쪽의 의도를 잘 간파해서 정교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앞으로 상황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경계했다. 하지만 최병렬 대표는 이와는 반대로 초반에 국민투표 수용 카드를 너무 일찍 꺼냄으로써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아마추어적인 발상에 대한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렇다면 윤 의원이 걱정한 위험한 정치환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이번에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이 과거의 정치부패 청산이라는 이슈로 몰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모든 정치권이 ‘처분 대상’이 된다. 그래서 노 대통령 자신이 재신임 카드를 통해 정치개혁의 명분을 먼저 확보하려고 했다는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지금 윤 의원의 ‘의심’은 점점 기정사실처럼 굳어져가고 있다. 과연 노 대통령은 윤 의원이 염려하는 ‘정치도박’에서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먼저 이번 재신임 파문의 ‘근원’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통령이 최근의 ‘초 여소야대’ 정국과 측근 비리 의혹을 견디지 못해 돌발적으로 재신임을 제안한 것인지, 아니면 정권 출범 초부터 정국 운영이 벽에 부닥치자 미리 타개책을 마련해 놨다가 최도술 전 비서관 일을 계기로 칼을 빼들었는지에 대해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최근 노 대통령의 행적을 보면 재신임 발언이 돌발적으로 나왔을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먼저 노 대통령은 지난 9월 중순 강금실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최도술 사건에 대한 대략적인 브리핑을 보고 받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최도술 사건에 대한 보도를 보았을 때 눈앞이 캄캄했다.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그 허물이 드러나는 것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 지난 10일 노무현 대통령이 ‘재신임’ 기자회 견을 하는 모습. ‘비밀’은 ‘앞’에 있는 것 일까, ‘뒤’에 있는 것일까.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은 지난 9월 김정길 전 의원 등 측근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민주당 탈당 문제를 거론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때 “정국 운영이 매우 힘들다”고 토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최근 들어 노 대통령이 난국 타개책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지난 10월13일 시정연설에서 “여러 날을 두고 고민했다”고 전제하면서 “지난 8개월 동안 해온 일을 하나하나 따지면서 성찰하는 시간도 보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이보다 훨씬 전부터 재신임을 포함한 ‘깜짝쇼’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야당의 국정 발목잡기를 지켜보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현재의 정국을 뒤집을 수 없다고 인식하고 오래 전부터 정국 반전 플랜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건 노 대통령의 ‘도박정치’ 구상의 근원은 지난 8월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견해도 있다. 취임한 지 6개월을 넘어섰지만 지지도는 여전히 바닥을 맴돌고 있을 때였다. 이때 청와대 내부에서는 대통령이 정국 반전을 위해 ‘중대결심’을 할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굿모닝시티 사건이 터지면서 당시 민주당 정대철 대표와의 관계가 삐걱거렸고 민주당 탈당설이 나오는 등 정국이 갑자기 악화일로를 걷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대로 간다면 국정 운영도 제대로 못하고 내년 총선에서마저 패배해 ‘식물정권’으로 전락할 위험을 걱정하던 시기였다.
청와대 한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뭔가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상당히 됐고, 그 내용은 정기국회가 끝난 뒤 연말쯤 정치개혁을 걸고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해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최도술이라는 20년 측근의 수뢰 의혹이 터져 나오면서 시기를 앞당기고 내용도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만약 노 대통령이 오래 전부터 이번 일을 ‘기획’했다면 과연 어떤 참모와 은밀히 상의를 했을까. 현재 문희상 비서실장도 재신임 회견 바로 1시간 전에 통보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고 다른 청와대 참모들도 전혀 대통령의 폭탄발언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고뇌에 찬 결단’을 홀로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 재신임 건과 같은 파격적인 결정 과정으로 보아 ‘파괴적이고 창조적인 조언’을 할 수 있는 어드바이스그룹이 노 대통령 주위에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노 대통령과 오랫동안 호흡을 같이해 온 안희정 이광재씨 등 386 그룹인지, 부산의 ‘외곽지지 그룹’인지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려운 상태다.
일부이긴 하지만 노 대통령이 갑자기 재신임 건을 꺼낸 배경 중 하나로 최근 폭발력을 보이고 있는 SK 비자금 사건 수사 여파를 꼽는 이들도 있다. 돈의 규모와 최종 전달지가 밝혀질 경우 파문이 커질 수 있어 사전 진화 차원에서 충격 요법을 썼다는 시각이다.
정가 일각에선 먼저 최씨가 받은 CD 11억원 외에 ‘플러스 알파’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최씨가 SK 외에 다른 기업으로부터도 금품을 제공받은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11억원이 전부가 아니며 돈의 최종 목적지도 최씨가 아니다”라는 등 각종 의혹들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SK가 돈을 건넬 때 ‘당선축하금’ 명목으로 최씨에게 준 것이 아니라 대통령 주변 다른 고위 인사에게 전해달라며 준 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그 돈을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최근 검찰의 한 관계자는 “최씨가 지난해 대선 직후에 받은 SK 비자금은 넓은 의미에서 대선과 관련이 있다”고 밝혀 최씨 사건이 여권의 대선자금으로도 불똥이 튈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의혹들이 ‘거침없는’ 검찰의 손끝에서 사실로 드러날 경우 그 불똥이 자칫 대통령에게까지 튈 가능성이 있어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재신임 정국을 조성했다는 시나리오도 있다.
최도술 전 비서관은 지난 20년 동안 노무현 대통령의 ‘금고지기’를 해온 인물. 그래서 야당 일각에선 최씨의 ‘X파일’이 공개될 경우 직·간접적으로 노 대통령이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배수의 진’을 친 것이라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는 도덕성에 관한 한 결벽증적인 완벽함을 보이고 있는 노 대통령의 성품상 그리 설득력이 있는 시나리오는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다.
끝으로 남는 의문점은 국민투표 전격 결정의 배경에 노 대통령의 미래를 예측하는 노림수가 담겨 있었느냐는 점이다. 노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에서는 국민투표에 대해서 그리 적극적인 생각을 피력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재신임 여부가 국민투표를 실시할 만큼의 국가 안위와 직결된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며칠 뒤인 지난 13일 전격적으로 국민투표 날짜까지 못박음으로써 ‘헤매는’ 야당의 뒤통수를 쳤다.
이 전격 결정을 두고 일각에서는 ‘야당이 주춤거릴 것이라고 간파한 노 대통령이 국민투표 날짜까지 못박아 야당이 취할 운신의 폭을 좁히고 국민과의 직접 정치 명분을 얻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야당은 처음 국민투표를 덥석 받았다가 노 대통령의 정치개혁 연계의 ‘비수’를 알아차리고 국민투표 불가를 뒤늦게 외치고 있지만 이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나라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노 대통령의 국민투표 날짜 발표가 ‘오버페이스’라고 그의 결정을 깎아 내렸다. 그는 “대통령이 애초부터 국민투표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첫 기자회견 뒤 여론조사가 재신임 찬성 쪽으로 기울자 이에 자신을 얻어 측근 비리의 참회보다는 정치권 전반에 개혁을 촉구하는 등 대의명분 축적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시정연설에서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국민투표 날짜까지 과감하게 정해 버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인사는 노 대통령이 너무 ‘흥분’해 날짜까지 못박아버린 것은 너무 ‘오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왜냐하면 위기감을 느낀 야 3당이 서로 공조해 재신임 국민투표를 저지시켜 노 대통령의 권위에 큰 타격을 줄 계획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