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청와대
박근혜 정부는 출범과 함께 지난 정권에서 이뤄진 공공기관 입찰 자료를 제출받아 청와대 민정팀 주도 하에 분석을 진행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놓고 친이계 주변에선 정치적인 배경을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난 정부를 겨냥한 대대적인 사정의 정지작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당시 청와대 정무라인이 이 전 대통령 측에 “정치 보복과는 상관없다. 공공기관 개혁과 수장 교체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설명했지만 친이계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이 전 대통령의 역점 과제인 4대강 사업을 정조준하고 나서자 친이계의 ‘반 박근혜 기류’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현재 박근혜 정부의 4대강 사업 사정은 ‘투트랙’으로 이뤄지고 있다. 감사원은 사업의 적절성 여부 규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검찰은 입찰 비리를 파헤치고 있다. 이 중 친이계가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검찰 수사다. 감사원의 경우 그 내용에 따라 정치적인 반격이 가능하지만 검찰 수사에서 불법이 드러나면 이명박 정부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감사원의 4대강 감사결과 발표 직후 “4대강 살리기가 그 본질을 떠나 정치적 논란이 되는 것은 유감”이라는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적극 대응했던 이 대통령 측은 4대강 사업 수사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4대강 사업 비리 수사를 둘러싸고 친이·친박 갈등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위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퇴임 후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당초 이 전 대통령 측은 친박 핵심 라인을 통해 4대강 사업 수사에 대한 수위 조절을 요구했다고 한다. 친이계의 한 전직 의원은 “우리도 정권 초에 검찰 수사를 해봤다. 이 정도의 검찰 움직임이라면 박근혜 대통령 의중이 담겨 있는 게 확실하다”면서 “현 정부 청와대 고위직 인사에게 4대강 사업과 관련한 이 전 대통령 견해를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친박 측에선 냉담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친이계 전직 의원은 “우리 사정을 들은 친박 고위직 인사가 검찰 수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며 원칙론만 되풀이했다. 오히려 그 후에 수사 속도는 더 빨라졌고 강도도 세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박근혜 정부의 전방위적 사정에 친이계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특히 몇몇 강경파들은 선제공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수집했던 ‘박근혜 X파일’을 협상 테이블로 꺼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동안 정가에서는 박근혜 X파일 존재 여부를 놓고 추측만 무성할 뿐 그 실체가 공개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이 박 대통령과 관련된 고급 정보들을 갖고 있다는 데엔 이견이 없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경선 당시 국정원 내 ‘박근혜 TF팀’이 이 전 대통령을 도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바 있고, 민간인 불법 사찰 논란 때 박 대통령도 그 대상이었다는 정황이 나오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를 비롯한 주요 현안에서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했던 박 대통령에 대해 상당한 자료를 수집, 축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최근 친이계 내부에서 박 대통령 대선자금 얘기가 제법 설득력 있게 돌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박 대통령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한 친박 의원이 관여하고 있는 단체가 거액의 대출을 받았고, 이 돈이 박근혜 후보 캠프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이 소문의 골자다. 이러한 내용은 대선 당시 사정당국을 통해 이 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간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원세훈 전 원장 구속을 놓고 친이계를 향한 경고성 메시지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친이계의 이러한 분위기에 박 대통령 측근들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친이계에서) 험한 말들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 정도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친이계가 대선자금이라는 ‘뇌관’을 건드린다면 이 전 대통령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원 전 원장 구속을 놓고 친이계를 향한 경고성 메시지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국정원을 오래 이끌었던 원 전 원장은 박근혜 X파일에 가장 근접한 친이계 인사로 꼽힌다. 실제로 원 전 원장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여러 채널을 가동해 이 자료들을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원 전 원장은 건설업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가 드러나면서 개인비리로 구속된 두 번째 정보기관 수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원 전 원장 구속 이후 친이계 내에서 강경파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자칫 이 전 대통령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을 것이란 우려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친이계 내에서도 온건파로 꼽히며 친박과 비교적 관계가 원활한 전직 청와대 고위관료가 중재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익명을 요구한 그는 “중재라기보다는 오해를 푸는 과정으로 봐 달라. 우리 쪽 일부 인사들이 정제되지 않은 발언으로 박 대통령 심기를 불편하게 한 부분에 대해 사과 표현도 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친이계가 한 발 물러나면서 일단은 양측의 싸움이 수그러든 모양새지만 검찰 수사 추이에 따라 언제든 재점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박근혜 X파일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