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0일 오후 5시께 청와대 춘추관. 오후 백브리핑(배경설명)에 나선 이정현 수석의 이 말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어…?” 하는 반응이 나왔다. 매일 오전·오후 백브리핑을 하면서도 늘 “이건 ‘오프더레코드’로 하고…”, “이건 기사로 쓰지 말고 참고만 하고…”를 연발했던 이 수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나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아닌 ‘이정현 홍보수석’의 말이라고 해달라니…. 이 수석이 자신의 발언을 실명으로 보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 자체로 ‘명명백백한 청와대의 공식 반응’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정현 홍보수석이 4대강 감사 결과를 두고 MB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정가에서는 “박근혜정부가 MB정부 청산에 들어갔다”고 관측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이 수석은 “감사원 감사 결과가 사실이라면 국가에 엄청난 손해를 입힌 큰 일”이라며 “국민을 속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전모를 확실히 밝히고 진상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다”며 “국민들에게 잘못된 부분은 사실대로 알리고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고,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 수석은 브리핑 말미에 “이것은 공식 입장”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날 이 수석의 브리핑은 즉각적으로 “박근혜의 청와대가 드디어 ‘MB 정부 청산’에 들어갔다”는 해석을 낳았다. 지난해 대선 당시 MB에 대한 국민 여론이 극히 악화돼 있을 때에도 차별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스탠스를 바꾼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 같은 해석에 대해 “뭐하려고 일부러 싸움을 하겠느냐”고 부인했지만,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여당인 새누리당, 특히 친이계에서도 이 수석의 브리핑에 대해 ‘MB 정부에 대한 차별화 시도’라는 해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수석의 브리핑 과정이 이 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브리핑이 있었던 지난 10일은 유난히 큰 기사거리가 많았던 날이다. 감사원이 4대강 사업 감사 결과를 발표했을 뿐 아니라 박 대통령이 언론사 논설위원실장 및 해설위원실장들을 청와대에 초청, 오찬을 함께 하면서 A4용지 20장 분량의 발언을 쏟아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개인비리 혐의로 구속됐고, 국정원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로 봐야 한다는 취지의 보도자료를 냈다.
2011년 10월 여주군에서 열린 4대강 새물결맞이 기념행사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이에 대해 “오후 5시면 가판을 찍는 조간신문의 경우 1차 마감이 끝났을 시간”이라며 “언론의 시스템을 잘 아는 홍보수석이 그 시간에 그런 내용의 브리핑을 했다는 것은 그날 저녁 TV 뉴스와 다음날 조간신문 1면 톱을 바꾸겠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수석의 브리핑으로 인해 당일 있었던 박 대통령의 논설위원실장·해설위원실장 오찬 간담회 기사가 오히려 덜 부각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면서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브리핑을 강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 감사 결과에 대해 청와대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청와대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MB 정부와의 차별화와 직결된다. 분명하게 진상이 드러나고 있는 MB 정부의 실정의 책임까지 다 뒤집어쓰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전 정권과 연관된 문제가 터질 때마다 이런 뜻을 내비쳐 왔다. 원자력발전소 비리 사건이 터졌을 당시인 6월 11일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원전 비리는 역대 정부를 거치면서 쌓여온 일이다. 새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라는 것은 난센스적인 일”이라며 “과거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새 정부에 전가할 문제는 아니다. 과거 정부에서 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는지 밝혀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국정원 여직원 김 아무개 씨가 불법선거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서에 들어서는 모습.
박 대통령은 한 발 더 나아가 “과거 정권부터 국정원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돼 왔다. 이번 기회에 국정원도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국정원 개혁 필요성을 역설했다. MB 정부라고 콕 집어 말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전 정부의 국정원은 개혁의 대상일 뿐이라는 얘기다.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 이 수석의 공개적인 비판까지 터져 나오자 친이계의 표정은 당혹 그 자체다. 겉으로 드러내고 싸우긴 어렵지만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최근 청와대가 보여준 일련의 흐름이 의도적인 MB 정부 깎아내리기, 의도적인 차별화 시도라는 판단에서다. MB 정부 핵심 관계자는 “(청와대) 내부 회의에서 7 대 3, 6 대 4 정도로 ‘MB와 차별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고 한다”면서 “적군 같으면 정치보복이라고 밀어붙일 텐데, 사촌이 더 무섭다”고 곤혹스러워 했다.
하지만 MB 정부에 대한 박 대통령과 청와대의 차별화 시도가 궁극적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과 현 정부가 MB 정부의 실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친이계 인사는 “야당에서 진작부터 박 대통령에 대해 ‘유체이탈 화법’을 쓴다는 비판이 나오지 않았느냐. 대통령과 청와대가 마치 남일 얘기하듯이 MB 정부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라며 “다른 건 몰라도 국정원 댓글 사건만큼은 박 대통령도 책임론을 피하기 어려운 사안”이라고 청와대의 자중을 촉구했다.
청와대가 결과적으로 정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것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새누리당 김기현 정책위 의장은 이 수석 브리핑에 대해 “청와대가 자꾸 정쟁에 뛰어들어 혼란을 부추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