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발가벗겨진 20대 여성이 변사체로 발견된 영등포 노들길 인근. 작은 사진은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만든 용의자 몽타주. 박은숙 기자
김 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신원을 파악한 결과 시신은 서울 관악구에 사는 진 아무개 씨로 확인됐다. 전북이 고향인 진 씨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해 3개월 전 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살고 있었다. 그는 사체로 발견되기 이틀 전인 2일 고향 친구 A 씨(여)와 홍대 인근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A 씨는 경찰 조사에서 “그 친구가 그날따라 계속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강에 가고 싶다고 하기에 술을 마시고 3일 새벽 1시에 택시를 타고 당산역 부근에서 멈춰 섰다. 그런데 친구가 택시에서 내리며 ‘혼자 있고 싶다’는 말과 함께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따라갔지만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그 당시 취업공부에 집중하겠다며 휴대폰도 정지시켜 놓은 상태였다. 결국 나 혼자 집으로 돌아가 친구에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이렇게 시체로 돌아올 줄 몰랐다”고 밝혔다.
실종 당시 진 씨는 술을 마신 상태였지만, 그의 사체에서는 혈중 알코올이 검출되지 않아 경찰은 진 씨가 4일 오전 12시 전후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진 씨가 실종 후 12시간 이상은 살아 있었다는 의미다. 구타나 성폭행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진 씨의 목에서 끈으로 졸린 흔적이 발견됐다. 한 번에 죽이지 못했는지 두 번의 자국이 있었다. 팔은 묶여있었던 듯 테이프가 감겼던 자국이 남아있었다. 코와 여성의 성기에는 휴지가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사체는 매우 깨끗했다. 경찰은 범인이 범행 후 흔적을 없애기 위해 씻어낸 것으로 추정했다.
범인의 치밀한 범행수법에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경찰은 수사에 애를 먹었다. 진 씨를 봤다는 목격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산역 근처 빌라에 사는 학생이 진 씨가 사라진 장소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진 씨로 보이는 여성을 봤다고 말했다. 그는 “두 명의 남성이 한 여성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그 부근에 차량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학생의 진술은 진 씨의 인상착의와 다소 달랐다. 당시 경찰은 “학생이 진술한 모습은 진 씨 사건과는 거리감이 있었다”며 “사건 당일 진 씨는 빨간색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목격한 학생은 여성이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경찰은 다른 방도가 없어 학생의 진술을 토대로 몽타주를 만들어 배포했다.
2006년 7월 4일 새벽 서울 영등포구 양평6가 노들길 인근에서 발견된 진 씨의 사체. 진 씨의 생전 모습. 벗겨진 옷가지. 손목에는 테이프로 감긴 자국이, 목에는 끈으로 졸린 흔적이 남아있었다(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그러던 중 진 씨 사체가 발견되기 약 2시간 전, 시신이 발견된 장소에 차를 대고 서성이던 수상한 남자들을 봤다는 레커차 운전자 B 씨가 나타났다. B 씨는 “한 남성은 차 운전석에 앉아 있고, 다른 한 명은 진 씨가 발견된 수로 근방에 있었다”며 “웬만해서는 차가 서지 않는 곳에 정차해 있어 이상하다고 여겼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이들 2명을 강력한 용의자라고 여기고 본격적으로 수사에 들어갔다. B 씨는 최면수사를 통해 정차돼 있던 차량 번호판의 앞 두 자리 번호를 기억할 수 있었다. 경찰은 이 번호로 등록된 차량 소유자 1000여 명 가운데 남성을 대상으로 DNA 채취를 실시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식을 의뢰했다. 하지만 유전자 감식을 통해 용의자는 발견되지 않아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진 씨가 변사체로 발견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영등포 노들길 살인사건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경찰에서는 용의자도 추리지 못한 채 범인 특성을 추측할 뿐이었다. 경찰은 진 씨 살해방법이나 과정이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유형으로, 성폭행을 하지 않고 사체를 훼손한 것으로 보아 성적질환을 겪는 독거남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범인은 당산역 부근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도로와 연결돼 있어 차량을 통해서만 이동이 가능한 곳에 진 씨의 사체를 유기한 것으로 봐 차량 소지자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다만 목격자들의 진술에서 나타난 공범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나타냈다. 영등포 노들길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한 경찰 관계자는 “진 씨 사체를 끌고 온 흔적이 없고, 사체의 머리카락이 위로 쏠려있는 것으로 보아 공범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사이코패스 범죄의 경우 대부분이 단독범행이고, 노들길 살인사건의 경우도 2명이 나서서 살인을 저지를 동기가 뚜렷하지 않다”고 말했다.
영등포 노들길 살인사건은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마 범죄’로 추정되고 있다. 경찰 관계자들은 “묻지마 살인 사건은 원한 관계나 주변인 조사 등을 통해 용의자를 한정짓기 쉽지 않아 조사기간이 길어지면 범인을 밝혀내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앞서 사건을 담당했던 영등포경찰서의 한 관계자도 “당시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들은 현재 영등포경찰서에 몇 명 남아있지 않다. 지금은 거의 수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지방경찰청에서도 장기미제사건수사팀이 따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모든 사건을 재수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장기미제사건의 경우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거나, 사건을 새롭게 들여다볼 정황이 나왔을 때 재수사가 들어간다. 영등포 노들길 살인사건은 재수사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영등포 노들길에서 의문을 죽음을 당한 한 젊은 여성의 사인은 대중의 관심에서 점점 벗어나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