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가 KBO에 조속한 에이전트 시행을 권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야구계가 술렁이고 있다. 일요신문 DB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 김선웅 사무국장은 정부가 KBO에 에이전트 시행을 권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반색하는 눈치였다. 김 국장은 그간 정부의 지시를 KBO와 구단들이 무시해왔다고 말했다.
“KBO 야구규약은 야구계의 헌법이다. 이 규약에 에이전트 조항이 빠져 있다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규약 30조엔 ‘선수가 대리인을 통하여 계약을 체결하고자 하면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한다’는 문구가 분명하게 적혀 있다. 제도를 시행하라고 지시한 것도 선수들이 아닌 공정거래위원회, 즉 정부다. 정부가 시행하라고 명령한 제도를 KBO와 구단이 12년째 무시했다면 누가 믿겠나?”
실제로 2001년 KBO와 구단, 선수협은 에이전트 제도 도입에 합의했다. 당시 선수협은 ‘에이전트 제도가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연봉 협상 시 구단과 선수의 가교역할을 해줄 것’이라며 조속한 시행을 주장했다. 하지만, KBO와 구단은 “흑자를 기록하는 메이저리그와 달리 한국 프로야구는 모기업의 지원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만성 적자 구조”라며 “에이전트 도입은 국내 스포츠 시장이 좀 더 활성화한 이후 순차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옳다”는 시기상조론을 펼쳤다.
그러던 올해. 정치권이 프로야구 선수 권익에 관심을 나타내며 에이전트 제도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출발은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경실모)의 토론회였다.
4월 1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에서 열린 경실모의 ‘프로야구 선수 처우문제 및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김상민, 이재영 두 국회의원은 “구단에 일방적으로 힘이 쏠리면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들을 개선하지 않는 이상 프로야구는 그들만의 스포츠가 될 것”이라며 “구단의 일방적인 연봉 통보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에이전트 도입이 절실하다”는 의견을 냈다.
MLB 최고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 연합뉴스
5월 6일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스포츠 선수 인권 개선 심포지엄’을 열어 “연봉협상의 절차적 공정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에이전트 제도 시행이 필요하다”며 “야구규약에 명시된 에이전트 제도를 12년째 시행하지 않은 건 법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주장했다.
정치권과 변호사협회의 압박에 미온적 태도를 견지했던 정부는 적극 개입으로 자세를 바꿨다. 6월 중순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내 프로 스포츠 4개 단체에 ‘에이전트 도입에 대한 입장을 알려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특히나 KBO엔 “공정위가 명령한 에이전트 제도 시행을 12년째 미루는 배경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며 “규약에 따라 올 시즌이 끝나는 대로 에이전트 제도를 시행할 것”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KBO 관계자도 “주무관청인 문화체육부로부터 그와 같은 권유를 받은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에이전트 제도 시행을 권유한 건 2001년 이후 처음”이라며 “정부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정작 시행일자에 대해선 “확정된 게 없다”고 밝혔다. 9개 구단의 입장 조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구단들은 여전히 에이전트 도입에 미온적인 자세다. 선수들의 몸값이 폭등해 가뜩이나 인건비 부담이 높은 프로야구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한다. 하지만, 모 구단 사장은 “예전처럼 버티기로 일관하긴 힘들 것 같다”고 털어놨다.
“요즘 시대적 화두는 경제민주화다. 재벌기업들이 정부의 사정 칼날에 바짝 몸을 낮추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 정부와 정치권의 권유를 모른 체하긴 힘들다. 에이전트 제도를 시행하되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낫지 싶다.”
KBO는 시즌 종료하면 정기 이사회를 열어 에이전트 시행을 논의할 예정이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
좋은예 연봉협상 신경 뚝 야구에만 올인 / 나쁜예 변호사 에이전트 야구 ‘야’자도 몰라
# 프로야구 선수 A는 정규 시즌이 끝난 뒤 운동에만 열중한다. 오전엔 팀 동료들과 함께 홈구장에서 단체훈련을 하고, 오후부턴 개인훈련에 매달린다. A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11월만 되면 구단과 연봉협상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며 “구단의 낮은 제시액과 구단 측 연봉협상자의 고압적인 태도에 화가 나 운동에만 집중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에이전트 제도가 시행된 이후, A는 연봉 협상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자료 준비서부터 구단 관계자와의 대면 협상까지 에이전트가 책임지기 때문이다.
A는 “변호사가 정확한 연봉 산정 근거 자료를 제시하니 구단도 예전처럼 두루뭉술 넘어가지 못할뿐더러 ‘우리 제시액을 거절하면 국외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하겠다’는 협박을 하지 못한다”며 “에이전트가 협상 결과를 스마트폰을 통해 알려줘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 프로야구 4년 차 투수 B는 요즘 스트레스가 쌓인다. 연봉 협상철에 접어들었지만, 에이전트는 별 움직임이 없다. B는 “에이전트가 변호사라, 야구를 전혀 모른다”며 “자료라고 준비한 걸 봤더니 KBO 홈페이지에서 인쇄한 내 개인성적밖엔 없었다”고 털어놨다.
구단의 반응도 영 시큰둥하다. 에이전트의 준비가 부실하자 B에게 “뭐 하러 비싼 수수료를 주면서 에이전트를 쓰느냐”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 협상하면 네가 요구한 금액으로 마무리짓겠다”고 제안했다.
올 시즌 연봉이 5000만 원인 B는 고민을 거듭했다. 만약 자신이 제시한 7000만 원을 구단이 들어준다면 에이전트에게 수수료 3%(210만 원)를 줘야 했다.
B는 ‘실질적인 연봉 협상은 내가 했는데 왜 210만 원을 줘야 하지’하는 생각에 갑자기 수수료가 아까워졌다. 결국 B는 에이전트를 배제하고, 구단과 만나 일사천리로 연봉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