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의 정치지형상 ‘노 대통령 하야’라는 시 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최도술씨의 발언과 검찰과 한나라당의 의지 여 하에 따라서는 노 대통령이 모든 것을 잃을 가 능성도 있다. 사진은 10월11일 긴급 기자회견 을 마치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 노 | ||
그 ‘저의’가 무엇이었든 간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노 대통령에게 재신임 정국은 반전의 카드를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정국을 개혁 대 반개혁 세력으로 몰아 정치권을 재편할 수 있고, 또 흩어진 개혁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으며, 통합신당에 동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대반전의 카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의 앞길에 몇 가지 위험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선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이 변수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변심을 하고 ‘입’을 열게 될 경우 노 대통령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깊은 내상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는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뜻밖의 ‘지뢰’가 터질 경우다. 검찰이 최 전 비서관 등의 수사과정에서 나온 ‘돌출변수’를 덮지 않고 성역 없는 수사를 외친다면 노 대통령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국면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마지막 변수는 야당의 강화된 대응전략이다. 재신임 국민투표가 유야무야되고 여세를 몰아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한다면 이원집정부제의 권력형태를 거치면서 노 대통령이 자연스럽게 하야할 국면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정치 지형상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올인’을 한 이상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계산을 충분히 했을 것이다. 노 대통령에게는 악몽과도 같을 수 있는 시나리오 세 가지를 미리 짚어본다.
먼저 거론되는 것이 최도술 변수다. 최 전 비서관이 자신을 ‘희생양’이라 여기고 변심을 하게 된다면 그의 ‘입’에서 얘기치 않는 발언들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 일단은 최 전 비서관이 노 대통령의 20년 측근으로서 수많은 고비를 함께 넘겼기 때문에 끝까지 ‘일편단심’을 지킬 공산이 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돌발적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검찰은 지난 10월15일 최 전 비서관을 구속하면서 이례적으로 정치자금법 위반과 특가법상 알선수재 혐의를 함께 적용(상상적 경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것은 SK로부터 받은 11억원이 청탁 대가라는 점(알선수재)을 확실하게 입증하지 못한 데 따른 고육책으로 해석됐다. 검찰은 법원이 알선수재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함께 적용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통해 최 전 비서관을 사법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최 전 비서관의 태도다. 검찰이 알선수재에 따른 개인 비리로 자신을 처벌하든지, 정치자금법에 따라 처벌하든지 최 전 비서관이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결정했다면 검찰의 기소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최 전 비서관은 검찰의 ‘이중기소’ 중 자신의 개인비리 혐의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만약 최 전 비서관이 개인 비리로 검찰에 기소돼 처벌을 받는다면 대통령과 무관함이 입증되어 노 대통령에게도 큰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정치자금법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느냐에 따라 노 대통령도 안전하지 못한 상황으로까지 사태가 번질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이 과정에서 최씨가 자금의 ‘귀착점’에 대해 폭탄발언을 할 경우 이 사건이 야권의 대통령 탄핵이나 하야국면으로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 전 비서관은 노 대통령을 20여 년 동안 보좌해온, 특히 노 대통령의 ‘금고’를 주로 맡아온 최측근이다. 노 대통령이 지난 10월10일 기자회견에서 “그의 행위에 대해 제가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입이 열 개라도 그에게 잘못이 있으면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점도 노 대통령과 최 전 비서관의 깊은 관계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최 전 비서관의 그간 ‘역할’로 보아 최근 일각에서 그와 노 대통령의 관계에 금이 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 최 전 비서관은 노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청와대의 살림을 책임지는 총무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했으나 386그룹과 융화하지 못하고 따돌림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최씨는 모 수석비서관에 대해서는 상당히 어려워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해찬 통합신당 의원은 노 대통령 재신임 기자회견 바로 하루 전날 최도술 사건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최씨가 총무비서관을 그만둘 당시 돈 때문에 그랬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 일을 너무 못해 잘렸다는 말은 들었다. 총무비서관 자리는 준비해야 할 회의도 많고 할 일도 많다. 개인변호사 사무장을 하던 실력으로는 할 수 없다. 워낙 펑크를 많이 내고 일이 서툴러서 결국 그만뒀다고 한다. 그래도 그냥은 못 보내니 ‘부산에서 출마해라’ 하고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의원 주장의 핵심은 ‘최씨가 그 간의 공로로 청와대에 입성하긴 했지만 능력 부족으로 잘렸다’는 것이다. 문제가 이렇게까지 되었다면 청와대 참모들이 최씨의 퇴진을 건의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대통령이 직접 ‘잘랐을’ 가능성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최씨로서는 ‘주군’에 대한 서운함을 가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정가에선 최 전 비서관 사건과 관련해 또 다른 소문도 들린다. 최 전 비서관이 청와대에서 나온 뒤 ‘야인생활’을 할 때 SK 비자금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이름이 검찰의 조사대상에 오르내리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 그래서 이에 격분한 그가 청와대 고위 인사와 접촉해 이 문제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 지난 14일 대검에 출두하는 최도술 전 청와대 비서관. 임준선 기자 | ||
최 전 비서관의 입과 함께 향후 정국에 또 하나의 변수로 등장한 것이 검찰의 수사 의지와 수위다. 지금까지 의 정황으로는 검찰의 칼날이 대선을 전후한 최 전 비서관 주변 자금을 모두 파헤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대선 무렵 최 전 비서관이 관리해 온 돈들이 노 대통령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검찰도 수사 확대에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안대희 중수부장은 노 대통령 재신임 기자회견 직후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지금으로선 할 말이 없다”며 언급을 자제했다. “원칙에 따라 수사하겠다”는 평소 의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대검의 한 관계자도 “대통령이 재신임 기자회견을 한 뒤 검찰 내부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국가의 최고수장이 ‘이실직고’를 한 마당에 그 사건에 대해 더 난도질을 할 강심장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검찰 수사의 향후 수위를 예상하기도 했다. 또한 최 전 비서관 사건의 수사 주체인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노 대통령과 사시 17회 동기란 점이 이런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검찰이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대통령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검찰은 최 전 비서관을 압박하고 있지만 아직 그가 받은 SK 돈의 구체적인 용도는 밝혀내지 못한 상태다. 돈의 향방과 사건의 ‘몸통’을 둘러싼 의혹이 번지고 있는 상황이라 검찰이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부담을 떠안고 있는 상황. 그런 까닭에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노 대통령과 관련한 ‘돌출변수’가 나올 경우 이를 덮어둘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는 시각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받고 있는 것이 야권의 특검제 도입 주장이다. 야 3당은 지난 10월15일 대표 총무 회담에서 최도술 비리가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으면 특검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정치권이 노 대통령과 최도술 비리를 연결시켜 대통령 탄핵으로 몰고 가기 위해 억지로 없는 혐의에 대해 수사하라는 것’이라는 반박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검찰 상층부는 또 다시 특검에 의해 조직이 난도질당할 경우 더 이상 검찰이 설자리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정치권의 특검 주장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도술 사건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외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는 검찰의 존립 기반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을 공개해서라도 검찰의 독립 의지를 내보이려 할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연관성이 드러날 경우 최 전 비서관 사건이나 다른 기업 비자금 사건의 불똥이 노 대통령이나 그 주변에 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서초동에는 검찰의 ‘강공 전략’에 청와대도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위험수위에 이른 검찰의 수사 태도 때문에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송광수 검찰총장이 퇴진하도록 압박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런 소문은 결국 검찰이 이번 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확고히 세우려 할 경우 그 희생양이 노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에서 나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 대통령에게 닥칠 수 있는 또 하나의 불행한 시나리오는 야권의 치밀한 대응전략으로 정국의 대반전이 이뤄지는 경우다. 현재까지는 노 대통령이 재신임 국민투표 카드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재신임 발언 이후 흩어졌던 지지층이 다시 결집하고 정치개혁이 정치권 최대 화두로 떠오르는 등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다는 게 청와대의 분석이다. 하지만 이런 ‘호시절’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야 3당의 강력한 거부로 국민투표 실시가 불투명해지면서 노 대통령은 칼도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다시 칼을 칼집에 넣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부담감도 갖게 됐다. 이럴 경우 재신임 카드가 몰고온 정국 불안정과 국력 낭비의 책임이 모두 노 대통령에게로 넘어갈 공산이 있다. 그 결과 대통령 권위가 훼손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지도력에 더욱 더 큰 구멍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한나라당은 바로 이런 점을 정국 대응 전략의 키 포인트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국민투표를 통해 당장 승부를 내기보다는 총선을 거쳐 장기전으로 끌고가 결국 대통령 하야 국면을 조성한다는 속셈이다. 최근 기자는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를 통해 당의 재신임 정국 대응 전략을 들을 수 있었다.
먼저 노 대통령이 신당에 입당하도록 계속 압박을 하고 전문성 있는 중립적 인사로 비상거국 내각을 구성하도록 요구한다는 것. 비상거국 내각은 재신임 국민투표 때라도 선거의 중립적 관리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조치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게 핵심사항이다. 두 번째는 노 대통령의 측근 비리 진상규명을 계속 강조하면서 또 다른 친인척 비리에 대해서도 공세를 펴나간다는 것이다. 또한 양동작전으로 정치개혁에 대한 이슈를 계속 제기해 노 대통령의 정치개혁 주장에 물타기를 시도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경제 살리기와 예산안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초당적으로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줘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다는 점이다.
이런 한나라당의 대응전략이 들어맞는다면 굳이 재신임 국민투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게 당 브레인들의 ‘셈법’이다. 국민투표가 위헌임을 부각시키면서 투표 자체를 무산시킨 뒤 당의 역량을 총선에 집중시킨다는 것. 한나라당의 이경재 의원은 이에 대해 “현재 국민투표가 실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면 대통령의 권위에도 타격이 올 것이고 이에 더해 최도술 비리까지 총선으로 끌고갈 경우 한나라당이 과반수 내지는 원내 1당을 차지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나라당은 향후 17대 총선에서 이길 경우 민주당에서도 주장하고 있는 책임총리제를 실현시켜 ‘내치는 총리, 외교국방은 대통령’이 맡는 ‘이원집정부제’로 국정을 운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반쪽 대통령’으로 전락한 노 대통령이 스스로 비참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하야할 것이라는 게 한나라당이 그리는 ‘그랜드 플랜’이다.
지금까지 노 대통령이 결코 바라지 않을 악몽의 시나리오들을 살펴보았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카드로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았다 한 순간부터 이미 우리 정치판에 예측은 존재하지 않게 돼 버렸다. 여기에 최악 시나리오의 무서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