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체육시민연대 회원들이 정치인들의 체육단체장 진출을 반대하며 시위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러나 그 행사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A 씨는 “단체 직원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회장의 지역구 관련 행사에 나가 일을 도와야 했다. 또한 해당 체육단체장은 자신의 지역구에 화환을 보낼 일이 있을 땐 단체장의 직함을 내세워 보냈다. 물론 체육단체의 공금으로 결제가 이뤄졌다”고 전했다.
체육단체장들의 공금횡령 및 인사 비리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에 박근혜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나서서 체육 단체의 비리 근절을 위해 칼을 뽑아 들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 7월 23일 국무회의에서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체육단체 운영비리 및 개선보고’를 받으면서 각종 체육단체의 운영 현황과 단체장 임기 등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해 비리가 적발된 단체장에 대한 검찰 고발 및 단체장 교체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체육인들을 키우고 양성해야 할 각 체육협회의 단체장들이 다양한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본인의 명예를 위해서 협회장을 하거나 장기간 운영하는 것은 우리 체육 발전을 위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5월 선수 아버지의 자살로까지 번진 태권도 심판 판정 문제까지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내년에 우리나라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는데, 그 전에 문제들을 바로 잡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대통령이 특정 사건까지 언급하며 체육단체의 비리 근절을 지시하자 상급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는 비상이 걸렸다.
국내의 체육단체는 크게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로 나뉘어 있다. 대한체육회 산하에는 종목별 70개 가맹경기단체(준가맹 3개, 인정단체 12개 포함)가 있고 그 밑에 시·도 경기단체 774개가 있다. 경기단체와 별도로 시·도 체육회 17개 및 시·군·구 체육회 216개도 운영되고 있다.
국민생활체육회도 시·도 생활체육회 17개와 그 밑에 229개의 시·군·구 생활체육회가 있고, 65개 중앙종목연합회 하부조직으로 765개 시·도 종목연합회와 6393개의 시·군·구 종합연합회가 구성돼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역시 비슷하게 행정체계에 맞춰 500여 개의 전국적 조직이 분포돼있다.
이렇듯 체육단체들이 복잡하고 세밀한 조직들로 구성돼 있다 보니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자신들이 지원하는 보조금에 대해서만 일부 감독권을 행사하지, 제대로 관리 감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실제 국민생활체육회 소속 단체들이 정부 지원금 및 출연금, 후원금 등 자체 수입까지 합해 1년에 지출하는 돈은 1조 3000억여 원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대한체육회 역시 지난해 6264억 원을 썼다고 나와 있지만, 이 금액은 시·군·구 단위의 체육단체 예산은 빠진 액수다. 이런 구조 때문에 회계 부정이나 권한 남용, 이권을 위한 인사 잡음 등 개인의 잇속을 노리고 단체장에 나서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국민생활체육회장 시절 판공비 논란을 일으킨 유정복 장관(왼쪽)과 태권도협회장 취임 후 조직개편안이 거부된 김태환 의원.
체육단체장 자리에는 체육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기업가나 정치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특히 체육단체를 후원할 자금이 넉넉한 기업인들이 명예를 얻기 위해 체육단체장을 선호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기침체로 기업가들의 단체장 겸직 사례가 줄어들면서 정치인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앞서 국민생활체육회장에 오른 서상기 의원을 제외하고 현재 대한체육회 산하 56개 가맹경기단체의 장 중 정치인의 수는 9명이다.
그중 집권당인 새누리당 의원이 6명이다. 대표적인 친박계로 분류되는 김재원, 이학재, 홍문표 새누리당 의원이 각각 대한컬링경기연맹, 대한카누연맹, 대한하키협회의 회장에 줄줄이 선출됐다. 이어 대한태권도협회장은 김태환 의원이,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은 장윤석 새누리당 의원이 차지했다. 대한야구협회장의 자리는 ‘친이’계의 대결로 펼쳐졌는데, 강승규 전 대한야구협회장을 꺾고 이병석 국회부의장이 선출됐다. 야당에서는 신계륜 민주당 의원만이 유일하게 대한배드민턴협회장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현역 의원은 아니지만 대한배구협회의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과 대한롤러경기연맹의 유준상 새누리당 상임고문도 연임에 성공했다.
기본적으로 체육단체장은 월급이나 차량 지원도 없는 명예직이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체육단체장 자리가 들어오면 마다하지 않는다. 체육단체장 활동을 통해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고, 대중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어 ‘선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 대한장애인체육회 등 체육단체들은 중앙조직뿐만 아니라 시·군·구 동네 단위까지 1만 개가 넘는 하부 조직을 두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단체장에 오르면 기본적인 인맥을 확보할 수 있어 각종 선거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02년 대선 당시에도 새누리당 정몽준 전 대표는 대한축구협회장과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직을 바탕으로 인지도를 쌓아 유력 대선주자로까지 급부상했다.
까다로운 공직선거법 제약도 피해나갈 수 있다. 앞서 체육단체의 A 씨는 “정치인들이 선거기간이 아닐 때도 체육단체장 직함을 이용해 정치 홍보 활동을 할 수 있다. 또한 각종 지역 활동에 필요한 자금도 체육단체장의 직함을 내세우면 체육단체의 공금도 끌어다 쓸 수 있다”고 귀띔했다.
체육단체장에 오르면 자신의 측근들에게도 자리를 줄 수 있는 인사권이 생긴다. 지난 4월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김태환 의원은 부임 후 처음 모색한 조직개편안이 부결되는 일을 겪었다. 이사회에서는 개편안에 많은 의혹이 있다며 김 의원이 특정인을 국장으로 승진시키려 하거나 그의 선거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을 채용하기 위한 수순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한편 여야 정치권에서는 지난 1월 국회의원 겸직금지 대상을 지정하면서 체육단체장을 포함시키기로 합의했지만, 아직까지도 국회 운영위에서 계류 중이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자체 점검만…‘눈 가리고 아웅’
박근혜 대통령의 체육단체장 비리 근절 한마디에 문화체육관광부는 ‘스포츠 공정 태스크포스’ 구성을 포함한 개선 방안을 마련해 조사에 들어갈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문화체육관광부는 체육단체장의 운영 현황과 단체장에 대한 비리 전수 조사가 실시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대통령의 지시와는 어긋나는 대목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한 관계자는 “국무회의에서 유정복 장관의 보고 내용은 체육기관의 운영규정을 점검해 투명성을 올린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체육단체 조직뿐만 아니라 단체장들에 대한 점검도 실시하라는 지시가 있어, 지금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조사 범위와 내용에 대해 검토 중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조사 내용이 확정되면 문화체육관광부가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의 각 단체들에게 자체 점검을 지시할 계획이다. 다만 비리 사실이 적발되더라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단체장들에 대한 고발 권한이 없어 법적 제재 여부는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체육단체의 한 관계자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체육단체장들에 대해 직접 비리를 조사하는 게 아니고 자체적 점검을 지시한다고 한다면 단체의 수장 비리를 적발할 수 있는 기관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조사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