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 비자금 수사에 대한 당지도부의 행태에 이회 창 전 총재 측근들의 불만의 소리가 높다고 한다. | ||
지난 10월25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차남 결혼식장을 찾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에게 기자들이 던진 질문이다. ‘미온적 대처’란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이었던 최돈웅 의원이 지난 대선 때 SK로부터 수수한 1백억원 수사에 대한 한나라당 지도부의 미지근한 대처를 지칭하는 것이다.
얼마 전 최돈웅 의원은 당 의원총회에서 당 지도부의 소극적 대처를 지적하며 “이대로 가면 나도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경고성 메시지를 날렸던 바 있다. 그리고 지난 10월22일 검찰 조사에서 최 의원은 1백억원 수수 사실을 시인하게 됐다. 최 의원이 미리 언급했던 그 ‘행동’이 시작된 것인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리지만 SK 비자금 수사는 이제 ‘끝장을 보아야 할’ 형국으로 치닫게 됐다. 이는 곧 당시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한 검찰 수사가 가능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이번 SK 비자금 수사가 ‘이회창 죽이기’로 이어질 가능성에 많은 정가 인사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지난 대선 당시 후원금 모금을 집행했던 당내 인사들은 대부분 이 전 총재 측근인사들이다.
대선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김영일 의원은 지난 10월26일 “SK 비자금 사건은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면서 “이 전 총재와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최병렬 대표도 “이 전 총재는 돈에 대해서는 벽창호 같은 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정가에선 이번 SK 비자금 수사의 최종점은 ‘이 전 총재가 SK 후원금 관련 보고를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에 맞춰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전 총재 측근인사들에 대한 검찰의 조사가 보다 철저하게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당 안팎에선 김영일 전 사무총장과 선대위원장을 지낸 서청원 전 대표는 물론 ‘자금모금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 나오연, 김기배 의원 등도 조만간 검찰 조사를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전 총재 후원조직이었던 부국팀 관계자들도 수사 선상에 오르내릴 전망이다.
일각에선 “이 전 총재 본인이 돈 관계를 몰랐던 것이 밝혀지면 그만 아닌가”란 의견도 제기한다. 그러나 이 전 총재 정계복귀를 염두에 둔 인사들이나 이 전 총재 영향력을 중시 여기는 당내 인사들의 입장은 다르다. 이들 인사들은 “이 전 총재 측근들이 줄줄이 검찰조사를 받고 이 전 총재까지 서면조사라도 받게 된다면 아무리 혐의가 없다는 결론이 날지라도 국민들은 ‘뭔가 있겠거니’하고 생각할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 이 전 총재의 측근들은 최병렬 대표의 ‘소극적 대처’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 ||
대선 당시 재정위원장이었던 최 의원이 기업 후원금 관련 조사를 받으면 결국 이 전 총재까지 수사 선상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인데 당에서 이를 ‘그냥 두고만 보았다’는 것이다. 이 전 총재의 다른 측근인사도 “최돈웅 의원 수사 때부터 당에서 강하게 나갔어야 했다. 두 번이나 당 대선 후보로 나섰던 분에 대한 예의도 없나”라고 편치 않은 심기를 드러냈다.
최돈웅 의원이 SK 비자금 수수 사실을 시인한 이후 최병렬 대표는 “당 대표로서 도덕적 책임을 느낀다” “이 전 총재는 비자금과는 무관한 분” 같은 말을 꺼냈다. 그러나 이 전 총재 측근들은 최 대표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소극적인 뒷북치기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최 대표의 의중을 의심(?)하는 시각이 하나 둘 생기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당 지도부가 이번 SK건을 통해 친 이회창 세력의 입지 약화와 소장파가 요구하는 인적 쇄신까지 어부지리로 얻으려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전 총재 측근으로 알려진 중진 의원들은 대부분 당내 소장파가 ‘물갈이 대상’으로 지적해온 인사들이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최 대표가 철저하게 수사해서 밝힐 것은 다 밝히자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수사나 여론의 초점이 이 전 총재로 몰리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 전 총재 본인도 이 같은 당 지도부의 처사에 대해 불만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10월24일 당 의원총회(의총)에서 이 전 총재 핵심측근인 하순봉 의원은 SK 수사와 관련해 “당이 몹시 흔들리고 있다. 당 지도부가 정정당당하게 대처해달라”고 주문했다. 하 의원은 의총 며칠 전 이 전 총재 옥인동 자택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져 그의 의총 발언에 이 전 총재의 의중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 것. ‘최 의원이 당 지도부에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전 총재도 최 대표에게 간접적으로 불만을 나타낸 것 아닌가’란 이야기가 나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한나라당 지도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당 지도부는 이번 SK 비자금 사건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설사 이 전 총재에 대한 검찰 조사가 이뤄진다 해도 당 지도부가 나서서 막을 수 없는 상태”라고 밝혔다. 최 대표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최병국 의원은 최돈웅 의원에 대해 “당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게 뭐 있겠나. 사실대로 다 밝혀서 처벌받을 사람은 다 받고 해야지. 여권과 도덕성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병렬 대표는 지난 10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번 SK 비자금 사건에 대한 특검제 도입을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당사자(한나라당)가 검찰 수사를 물리고 특검제를 주장하는 것을 국민들이 어떻게 볼까’란 회의론이 당내에서도 나오는 중이다.
▲ SK 비자금 사건과 관련, 검찰 수사를 받는 최돈웅 의원(왼쪽)과 김영일 의원. | ||
이 인사는 “최병렬 대표도 지난 대선 당시 선대위 공동의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최 대표는 기존 선대위 외곽에 있던 자문조직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대선 막판 이 전 총재 선거운동에 적극 개입했다. 대선 자금 경로를 모두 따지자면 최 대표도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를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며 불만을 쏟아냈다. 이 전 총재 측근들의 최 대표에 대한 반감의 수위가 갈 곳까지 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전 총재는 조만간 SK 비자금에 관한 기자회견을 할 것으로 알려진다. 이 자리에서 현재 당 지도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그러나 이 기자회견을 전후로 이 전 총재 측근들은 최 대표와 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낼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과 영남 민심에 이 전 총재의 잔영이 남아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최 대표 등이 당 안팎에서 상당히 수세에 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10월22일 차남 결혼식장에 나온 이 전 총재의 얼굴은 경사스러운 날임에도 썩 밝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있었던 이 전 총재 부친상엔 한나라당 의원들 거의 대부분이 얼굴 도장을 찍었던 것과 달리 이날 결혼식장엔 30여 명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웃는 얼굴로 축하인사와 답례를 주고받는 최병렬 대표와 이회창 전 총재를 보며 결혼식장 한켠에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는 마지막 장면이 될 것”이라 수군거리는 인사들도 있었다.